프랑스 작가 실비 제르맹(72). 1970년대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 지도 아래 석박사 논문을 썼다. 소설에도 그 영향이 고스란하다. 2024년 박경리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프랑스 작가 실비 제르맹(72). 1970년대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 지도 아래 석박사 논문을 썼다. 소설에도 그 영향이 고스란하다. 2024년 박경리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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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리디케를 구하고자 지옥으로 내려간 오르페우스는 규칙을 어기고 뒤를 돌아본다. 그의 시선에는 상황에 대한 불신, 대상에 대한 통제, 그리고 구원의 길을 죽음의 길로 되돌리는 파괴적 힘이 담겨 있다. 이것은 하나의 ‘응시’다. 스쳐 지나가던 시선이 하나의 대상을 향해 고정되는 순간, 관성의 시간은 멈추고 바라보는 자가 대상을 포획하는 비대칭적 관계가 형성된다. 만약 이 응시의 주체가 오르페우스가 아닌 에우리디케였다면 어땠을까. 어둠 속으로 끌려가던 여인이 지옥의 심연을 정면으로 마주한다면, 그는 자신의 구원자 혹은 파괴자가 될 수 있을까.

철학적 깊이와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현대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실비 제르맹은 ‘메두사 아이’를 통해 이 응시의 주체권을 에우리디케에게 돌려준다. 소설 속 지옥으로 끌려 들어가는 여자아이 뤼시를 구하는 것은 리라 줄을 튕기며 노래하는 유약한 오르페우스가 아니라, 뤼시 그 자신이다.

메두사 아이 l 실비 제르맹 지음, 이창실 옮김, 더서클프레스(2026)
메두사 아이 l 실비 제르맹 지음, 이창실 옮김, 더서클프레스(2026)

뤼시에게 지옥은 이복오빠인 페르디낭이다. 뤼시는 식인귀와 다름없는 오빠의 집요한 성적 학대와 폭력으로 유년 시절을 빼앗기지만, 가족도 단짝 친구인 루페도 그를 구원하지 못한다. 어른들의 외면과 어린 친구의 무력함 속에서 뤼시는 3년 동안 매일 조금씩 더 깊은 지옥으로 내려간다. 하지만 제르맹은 뤼시를 무력한 피해자로 남겨두지 않는다. 어느 날, 술에 취해 쓰러진 이복 오빠를 발견한 뤼시는 그 식인귀를 정면으로 내리꽂듯 응시한다. 뤼시의 압도적인 시선 앞에 가해자는 영혼을 빼앗긴 채 서서히 쇠락하여 죽음을 맞이한다. 뤼시의 응시가 ‘메두사의 눈빛’이 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페르디낭이 사라진 후에도 뤼시에게 구원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그는 복수 끝에 찾아온 허무와 증오, 그리고 자신을 혐오하는 마음과 싸우며 긴 방황의 시간을 보낸다. 흥미롭게도 이 방황에 종지부를 찍게 한 것 역시 또 다른 ‘응시’의 힘이다. 자기 고통에 갇혀 스스로를 돌처럼 마비시킨 뤼시에게 멀어졌던 단짝 친구 루페가 보내온 엽서 한장이 그를 바꿔놓은 것이다. 뤼시는 피렌체에서 온 엽서에 담긴 타데오 가디의 복제화 ‘목동들에게 전해진 고지’를 깊이 응시한다. 가장 낮고 소외된 자들을 향하는 그림 속 빛을 직면한 순간, 오직 자기 안의 지옥에만 갇혀 있던 이 메두사의 시선은 타인의 고통과 세계의 아픔을 향해 열린다. 그렇게 뤼시는 자신을 가두었던 어둠의 사슬을 끊어낸다. 오르페우스의 손에 끌려 나오는 대신, 혼자 힘으로 어둠의 문을 열고 나온 에우리디케가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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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맹은 오르페우스 없이 지옥을 탈출하려는 에우리디케, 즉 뤼시에게 ‘메두사의 눈’을 준다. 가해자를 응시하여 단죄하고, 한때는 자신을 지옥에 가두었던 그 메두사의 시선 말이다. 신화 속 희생양에 불과했던 여성들은 제르맹의 문학 안에서 이렇게 다시 태어난다.

하지만 이 신화의 진정한 전복은 그다음에 일어난다. 본래 메두사의 눈은 대상을 돌로 바꾸고 자신을 파멸시키는 ‘파괴의 시선’이었지만, 뤼시가 예술 작품을 직면한 순간 그 시선은 빛을 향해 걸어 나오는 동력이 된 것이다. 지옥에서 빠져나온 자는 비로소 빛을 향해 걸어 나가고, 제르맹은 영혼이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이 구원의 순간에 “성탄”이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실패로 끝난 신화는 이렇게 구원의 서사로 다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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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원 서사를 구현해 내는 작가의 도구는 회화적 글쓰기와 마술적 리얼리즘이다. 현실의 비극 위에 신화적 환상을 포개어 보여주는 마술적 리얼리즘은 도피를 위한 환상이 아니라, 차마 바라보기 힘든 잔혹한 진실을 직시하게 하는 미학적 도구가 된다. 또한 작가는 각 장마다 채색 삽화, 분필화, 세피아화, 목탄화 같은 미술 양식을 부여하여 사건을 정지된 하나의 그림으로 연출한다. 그리고 이 그림들의 정적 속에서 빛과 어둠의 농도를 조절하며 인물의 내면을 조명한다. 일식의 어두운 은빛, 가해자를 응징하는 메두사의 서슬 퍼런 눈빛, 그리고 뤼시의 상처를 감싸는 황금빛까지. 제르맹의 회화적 문체는 현실의 표면을 뚫고 들어가 그 뒤에 감춰진 신비와 비극의 진실을 펼쳐 보여준다. 근친상간과 아동학대라는 직시하기 힘든 잔혹한 현실을 신화의 장엄함과 회화적 표현을 통해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제르맹이 독자에게 건네는 메두사의 눈이 아닐까. 그의 글 안에서 우리는 어떤 고통과 비극도 두려움 없이 마주할 용기를 얻는다. 제대로 바라보는 순간 대상과의 관계가,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리듬과 방향이 달라진다. 변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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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맹의 세계에서 신화 속 인물들은 스스로를 구원할 주체성을 되찾는다. 메두사의 눈을 가진 에우리디케도, 저주받은 괴물로 소모되었던 메두사도 마침내 성탄의 빛에 이른다. 식인귀를 응시하고, 자기 삶의 가장 어두운 괴물성을 정면으로 마주함으로써 자신을 묶어두었던 죄의식과 비극의 사슬을 스스로 끊어낸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외부와 내부의 지옥 모두로부터 탈출한다.

이 모든 구원이 단지 ‘바라보는 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고통과 기억도 휘발되지 않도록 단단히 응축한 시선 덕분이다. 타인의 고통과 자신의 상처를 무감각하게 외면하는 일상의 흐름을 멈춰 세우고, 세계의 관성을 부수는 응시. 그 정지의 찰나에서 제르맹의 문학은 시작된다. 그러니 어둠을 직시하고 마침내 구원의 빛을 향해 함께 걸어가는 ‘응시’와 ‘문학’은, 어쩌면 하나의 운명 공동체가 아닐까.

신유진 작가·번역가

신유진 작가
신유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