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혁씨는 40대 남성으로 공기업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민혁씨가 다니는 회사는 조금 다른 제도가 있었습니다. 2년마다 다른 부서로 이동해 새로운 직무로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민혁씨는 업무가 익숙해지고 같은 부서의 사람들과 친해질 만하면 다른 곳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회사에서는 이를 ‘순환보직’이라고 했는데, 비리를 막고 청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민혁씨는 출퇴근 거리 때문에 이따금 이사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이들도 아빠 직장 위치에 따라 전학을 다녀야 했습니다. 민혁씨는 물론 가족들도 새로운 곳에 적응하느라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최근에도 민혁씨는 낯선 부서에 발령을 받았습니다. 자신이 이전에 하던 업무와는 전혀 다르게, 인공지능(AI)을 활용해야 하는 부서였습니다. 자신은 엑셀밖에 다룰 줄 모르는데 인공지능을 이용해 능숙하게 일하는 동료들을 보면서 주눅이 들었습니다. 부서장은 민혁씨에게 ‘인공지능을 이용하지 못하는 직원은 앞으로 필요 없어질 것’이라고 회의에서 말했습니다. 민혁씨는 가슴이 뜨끔했고, 인공지능에 익숙하지 않아 실수를 하는 바람에 동료들이 자신을 보고 웃었던 기억이 났습니다. 지난 2년간 친해진 전 부서의 동료들이 자신을 배웅해주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자신은 나이가 마흔이 넘어 중견이지만, 이 부서에서는 신입사원보다도 못한 능력으로 평가되는 것 같았습니다.
민혁씨는 이 부서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밤늦게까지 일을 했습니다. 이번에는 아이들 학교 때문에 이사를 하지 못해 통근 거리가 무척 멀었습니다. 지방에서 일을 끝내고 수도권에 있는 집에 가면 자정이었고, 다시 아침 일찍 일어나야 했습니다. 게다가 본사에서 업무 보고를 하는 일까지 맡게 되었습니다. 민혁씨의 동선은 매우 길어져서 자신의 부서와 집과 본사를 오가게 됐고, 하루에 수백킬로미터를 다녀야 했습니다. 버스와 택시 안에서 업무를 해야 하는 일도 흔히 있었습니다. 차 안에서 업무를 하면 더 피곤해져서 두통까지 생기기 시작했고, 점심을 거르는 일도 많아져 이제는 힘에 부치는 것 같았습니다.
업무를 하던 민혁씨가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일을 어쩔 수 없이 동료에게 물어본 어느 날입니다. 늘 친절하던 동료였는데 이번에는 짜증이 난 것 같았습니다. “제가 계속 민혁씨를 백업해야 하니 저도 힘드네요. 저도 제 업무가 많아서요. 알아서 하시면 안 되실까요?” 민혁씨는 “죄송합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뒤로는 동료들에게 물어보고 일을 진행하기도 어려웠습니다. 매뉴얼과 인계 사항은 있었지만 봐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이 많았습니다. 인계 사항에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라고 쓰여 있었지만 궁금한 것은 너무 많았고 전화나 메일을 하면 잘 연락이 되지 않았습니다.
민혁씨는 자신이 ‘번아웃’된 느낌이 들었습니다. 더 이상 업무에 대한 자신감도 없어지고 출근을 할 자신도 없어졌습니다. 장래가 암담하게 느껴져 차라리 모든 것을 끝내고 싶은 생각까지 들어 인근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민혁씨는 정신건강의학과 검사 결과 적응장애와 우울증으로 진단이 되었습니다. 적응장애란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으로 우울, 불안, 행동 문제 등이 나타나며, 그 정도가 임상적으로 현저해 일상 기능이 눈에 띄게 손상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질환을 말합니다. 민혁씨는 순환보직으로 인한 근무지와 근무 내용의 갑작스러운 변화가 적응장애를 유발했고 나아가 우울증까지 나타났습니다.
인공지능과 첨단 기술의 도입으로 업무의 전문성과 복잡도가 비약적으로 높아졌습니다. 순환보직으로 적응을 반복해야 하는 제도는 근무자들에게 극심한 인지적 부하와 우울감을 유발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기술을 익히며 간신히 적응할 만하면 또다시 낯선 부서로 밀려나 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직원들을 ‘영원한 초보자’로 만들며 전문성을 고사시키게 됩니다.
반면 서구 선진국들은 순환보직 제도가 없습니다. 고도의 전문성을 위해 장기 근무를 보장하고 비리는 투명한 시스템으로 통제합니다. 일본에 순환보직 제도가 있지만 한국과 달리 관련 분야 내에서 완만하고 장기적인 순환을 통해 전문성을 유지합니다. 이처럼 한국의 짧고 단절적인 순환보직은 인공지능 시대의 고도화된 업무 환경과 정면으로 충돌하여 개인의 마음 건강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문제를 유발하고 있습니다. 이는 민혁씨만의 문제가 아니라 민혁씨 가족들이 함께 직면하는 심각한 위협이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낼 수가 없습니다. 현재 상황을 ‘생존을 위한 수습 기간’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낯선 환경과 고된 이동 동선 속에서 무너진 일상을 회복하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삶의 주도권을 되찾고 서로를 지지하는 단단한 울타리를 형성해야 합니다. 인공지능 활용과 낯선 업무 속에서 이전 경력과 자신을 비교하며 자책하기보다는, “지금 내 뇌는 과부하 상태이므로 민폐만 끼치지 않고 기본만 하자”는 마음으로 기준을 대폭 낮추었습니다.
민혁씨는 인근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상담을 지속하면서 동시에 마음의 긴장을 조절할 수 있는 ‘바이오피드백’ 훈련을 병행하였습니다. 바이오피드백은 심박수, 심박 전이도, 뇌파, 근전도 등 생체신호 센서를 통해 자기 신체 반응을 실시간으로 확인하며 조절하는 비약물적 치료 방법입니다. 이를 통해 예민해진 뇌를 안정시키고 교감신경 항진이 호전될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상사에게 솔직하게 현재의 어려움을 전하며 업무 범위를 조율해나갔습니다. 또한 퇴근 뒤에는 업무 연락을 차단하고 가족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며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몰아붙이지 않고 가족의 따뜻한 지지 속에서 천천히 걸음을 내디디면서, 민혁씨는 서서히 업무에 대한 자신감을 되찾고 평온한 일상을 회복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개인별로 자세한 것은 반드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와 진료, 상담을 하면서 파악해야 합니다. 기사만 읽고 자기 자신을 진단하거나 의학적 판단을 하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 기사에 나오는 사례는 특정인을 지칭하지 않으며 이해를 돕기 위해 여러 경우를 통합해서 만들었습니다. 모두 가명을 쓴 것임을 밝힙니다.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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