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대 후반에 읽은 뒤 오래 잊히지 않는 글 한 구절이 있다.
그때 나는 기자로 일하고 있었는데 처음 만나는 이들에게서도 기자 같다는 말을 종종 듣곤 했다. 내게 관록이 붙었나 싶어 으쓱했던 때, 한 매체에 실린 소설가 김훈의 인터뷰를 읽고서 알량한 자부심이 바사삭 깨졌다. 김훈은 이렇게 말했다.
“기자를 보면 기자 같고 형사를 보면 형사 같고 검사를 보면 검사같이 보이는 자들은 노동 때문에 망가진 거다. 뭘 해 먹고사는지 감이 안 와야 그 인간이 온전한 인간이다.”
직업이 표정과 태도, 말투, 시선, 정체성까지 잠식해버릴 때 사람이 망가진다는 거였다. 그 구절을 읽으며 내게서 일을 빼면 나는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보았는데 내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아서 당혹스러웠던 느낌이 생생하다.
그 뒤로 사회적 역할과 나 자신을 구분하기, 일을 빼면 중요한 게 아무것도 없는 삶을 살지 않기를 자기 성찰의 기준으로 삼으려 노력했지만, 이는 말처럼 쉽지 않았다. 한창 일할 때는 역할과 나 자신을 구분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를 선명하게 상상하기 어려웠다. 더군다나 그 일이 내가 좋아하는 일이거나 아니면 반드시 성과를 내야 하는 상황에 처했을 때는 “노동으로 망가진” 사람의 얼굴이 실감 나지 않았다.
그 얼굴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인물, 비대한 직업적 자아가 사적인 삶을 삼켜버린 사람의 전형이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남아 있는 나날’의 주인공 스티븐스다.
이 이야기를 영화로 먼저 접했을 땐 젊은 날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황혼에 되돌아보는 가슴 아픈 로맨스로 기억했다. 한참 뒤에 읽은 원작 소설은 사랑 이야기보다는 직업과 자신을 분리하지 못했던 사람이 맞이한 슬픈 노후로 읽혔다.
영국의 대저택에서 30여년간 집사로 일해온 스티븐스는 평생 ‘위대한 집사’가 되기 위해 헌신한 나머지 자신의 역할과 자기 자신을 구분하지 못하는 지경이 되어버린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직업을 소명으로 받아들이는 이상주의적 신념을 지녔다. 스티븐스는 자신이 “집사로서 인류의 발전에 기여하는 신사를 섬기고자 하는 열망이 유별났던 이상주의적 세대”라고 회고한다. 그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에 작게나마 기여하고 싶은 소망”을 실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문명을 떠맡고 있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신사를 섬기는 것”이었다.
그가 꼽은 위대한 집사의 덕목은 품위, 즉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몸담은 전문가적 실존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다. 식탁 밑에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것 같은 놀라운 사건이 벌어져도 절대 흔들리지 않고 집사로서 전문가적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품위였다.
그런 그에게 사적인 삶이란 누구에게도 보일 수 없고 오직 혼자 있을 때나 드러내는 민낯이었다. 그에게 호감을 품은 총무 켄턴 양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의 마음을 열 수 없었던 것은 스티븐스가 켄턴 양을 좋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적 감정을 언어화하고 표현하는 능력이 퇴화했기 때문이었다. 그 능력은 하루아침에 사라진 게 아니라 품위를 지키려 애쓴 세월만큼 서서히 굳어버린 것이다.
비대한 직업적 자아에 짓눌려 굳고 퇴화하는 것은 감정만이 아니다. 여행길에 나선 스티븐스의 속 터지는 변명과 자기합리화를 따라 읽다 보면, ‘위대한 집사’라는 대의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정도가 강할수록 그가 더 경직되고 때로 위선적으로 된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스티븐스는 노집사인 자신의 아버지가 노쇠해서 일을 제대로 하기 힘든데도 이를 지적하는 켄턴 양에게 사사건건 반격하다가 기어이 사고가 나서 주인이 나선 뒤에야 아버지를 식사 시중 업무에서 뺀다. 전문가적 품위로 포장했지만 실제로는 부하 직원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이 옳다는 신념에 사로잡힌 자기기만이었다. 그가 지키려 한 것은 집사의 품위가 아니라 ‘대를 이은 위대한 집사’라는 사적 명예였다.
스티븐스는 자신이 평생 섬긴 신사 달링턴 경이 나치에 동조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에도 계속 달링턴 경의 행적을 재해석하고 방어하고 합리화한다. 자신이 삶을 걸고 동일시한 대상의 부도덕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일은 곧 자기 삶 전체를 직면하는 두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여행이 거의 끝날 무렵에야 스티븐스는 처음 만난 낯선 노인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잠깐 회한에 젖는다. 평생 굳어 있던 감정의 언어가 그제야 겨우 새어 나온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다시 “일 다음에 일, 그리고 또 일이 기다리고 있을 뿐”인 일상으로 돌아갈 채비를 한다. 자기 삶을 살 기회와 사랑을 스스로 놓쳐버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으면서도, 남아 있는 나날 동안 저택의 새로운 주인을 기쁘게 할 유머 기술이나 익히겠다고 다짐하는 스티븐스의 모습은 애달프다 못해 서늘하기까지 하다.
소설의 제목인 ‘남아 있는 나날’은 하루 중 남은 시간이자 인생의 남은 날이다. 30대 후반에 내가 김훈의 글을 읽은 뒤 시간이 훌쩍 흘러 이제는 직업인으로 오래 살아온 내 또래들이 잇따라 은퇴를 맞고 있다. 남아 있는 나날, 일이 빠져나간 자리에 무엇이 있는지가 이제 각자에게 드러날 것이다. 사회적 역할과 자신을 분리하지 못한 사람에게 스티븐스는 쓸쓸한 반면교사다.
“뭘 해 먹고사는지 감이 안 와야 온전한 인간”이라던 김훈의 말을 다시 생각해본다. 당신의 삶에는 일을 빼고도 중요한 것이 남아 있는가.
김희경 작가, 전 여성가족부 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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