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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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남쪽 끝 바다 있는 동네가 해남(海南)이라지요. 그 해남하고도 맨 끄트머리 바닷가 마을에 드나든 지가 30년입니다. 거기 사는 친구 방 창문 너머로 아스라이 보이는 섬들이 좋았습니다. 어느 해 가을엔가 사는 게 좀 버거워 지리산에 들렀다가 바닷가 그 방을 찾아갔는데 친구는 마침 서울 가고 없었어요. 저녁 해가 져도 불도 안 켜고 홀로 방안에 앉아 하염없이 창 밖 먼 섬들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방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불도 안 켜고 뭐 하시쇼.” 옆집 아주머니가 어둠 속에서 팥죽 한 그릇을 방안으로 밀어 넣고 가더군요.

언젠가 친구는 해남 사람치고 “떠나가는 배”를 못 부르는 이가 없다 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하고 묻다가 바로 답이 떠올랐습니다. 저기 거친 바다를 외로이 떠나가는 배가 있습니다. 겨울비에 젖은 돛에는 찬바람이 가득합니다. 언제 돌아온다는 헛된 맹세도 없이 배는 강남길로 해남길로 홀로 떠나갑니다.

그런데 이런 소설 배경 같은 해남에서 나는 딱딱한 송사(訟事)를 3년이나 벌렸지요. 하긴 소설이나 시 역시, 욕심부리고 화내고 어리석은 이 고해의 거친 바다에서 비롯된 거니 소설이나 송사나 근본은 매 한 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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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바닷가 조용한 이 마을에 어느 날 갑자기 소 키우는 축사가 들어섰습니다. 서로 ‘형님, 동생’ 하고 지내던 동네에 플래카드가 나붙고 소란이 일게 된 거죠. 관련 법과 군 조례에는 인가에서 100m 이내에는 소 축사를 짓지 못하게 되어있습니다. 건축 허가 신청이 들어오면 군청 공무원이 현장에 나가서 근처에 인가가 있는지, 있다면 100m 거리를 두고 있는지를 조사해야 합니다. 여기에 더해서 이웃 주민들 의견도 들어 결정해야 하는데 이런 절차가 전혀 없었습니다.

법을 떠나서도 평생 얼굴 맞대고 살아온 이웃 사이에 축사를 지으려면 미리 ‘형님 제가 이번에 소 좀 키워 보려는데 한번 봐주소’ 하고 양해를 구하는 게 도리겠지요. 그랬으면 이웃은 ‘그러게 동상’ 하고 허락을 할 수도 있었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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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도리로 보나 딱딱한 법으로 보나 축사 건축 허가가 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지요. 건축 허가 취소를 구하는 행정재판에서 비로소 처음으로 거리를 측량해 보니 97m. 결론은 보나 마나라고 나는 생각했죠. 그런데 웬걸, 판사는 방청 나온 군청 공무원한테 건축이 일단 완성만 되면 임시사용 승인해 주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식으로 묻더군요. 그날 재판이 끝난 뒤 소 키우려는 사람은 서둘러 축사를 완성하고 군청에서는 임시사용 승인을 했고 다음 재판 날 판사는 축사가 다 지어졌으니 이제는 건축 허가 적법 여부를 따지는 실익이 없다며 재판을 끝내 버렸습니다. 이게 무슨 무법자들이 판치는 미국 서부 활극도 아니고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민사재판을 걸어 축사 사용금지와 현장 조사를 하지 않은 군청에 대한 손해배상책임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판사는 법에서 정한 100m에서 3m밖에 위반을 안 했다며 책임이 없다는 겁니다. 친구는 ‘법에서 정한 100m를 판사가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당가’ 하고 나에게 묻더군요. 글쎄 말이야, 아이고 나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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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친구와 소 키우는 이웃은 서로 원수가 되었습니다. 친구는 공정한 처리를 기대했던 군청 공무원도 판사도 전혀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중간에 송사를 그만두자던 그 처와도 거리가 생겼습니다. 당연히 이길 거라 여겼던 친구의 기대를 못 맞춘 나는 멍텅구리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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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 생각해 보면 세상 돌아가는 게 다 이런 상황들의 연속입니다. 친구가 되었든 이웃 축사 주인이 되었든 군청 공무원이 되었든 판사가 되었든 아니면 내가 되었든 그 누군가의 욕심, 어리석음, 화냄의 결과로 세상은 늘 이렇게도 살기가 힘듭니다.

아니, 세상살이가 이다지도 힘든,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서로 다름’입니다. 서로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고 서로 이해관계가 다릅니다. 욕심, 어리석음, 화냄은 바로 이 ‘서로 다름’의 잘못된 표출 형식입니다.

이렇게 서로 다름에서 비롯되는 세상살이의 고통을 어찌 풀어나갈 수 있을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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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여러 주체들 사이의 서로 다른 생각과 이익을 조정하는 정치 제도와 법이 제대로 만들어지고 굴러가야겠지요. 얼마 전 화물운수 노동자들의 파업을 두고 정부는 업무개시명령을 압박 수단으로 썼습니다. 화물 노동자들이 장시간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운전을 해야만 겨우 먹고 살 수 있는 법 제도를 고치지 않고, 무조건 파업을 하면 잡아가겠다고 윽박지릅니다. 이건 서로 다른 이해를 조정해 줄 책임이 있는 정부가 일방적으로 어느 한쪽만을 편드는 겁니다.

승자독식. 불과 0.2% 차이로 이겨 놓고도 상대편을 완전히 배제하는 현행 대통령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과반에 육박하는, 다른 이해와 생각을 가진 국민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으면 결국에는 편이 갈린 양쪽 모두가 불행해질 겁니다.

무엇보다도 서로 다른 생각과 이익을 조정하는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을 잘 뽑는 거야말로 교회 열심히 다니고 절에 시주 잘 바치고 기도 열심히 하는 것보다도 더 효과적인,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최선의 방책이겠지요.

사실 우리네 종교인들은 서로 다른 이들이 모인 세상, 그래서 고통을 피할 길 없는 이 현세를 그래도 조금이라도 살기 좋게 만들려 하기보다는 이 한 몸 죽은 뒤 저 내세에 좋은 데 가는 데 훨씬 관심이 많습니다.

하지만 여러 스승들께서 이런 말, 저런 행동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으뜸(宗) 가르침(敎)은 하나같이 이 한 몸, ‘나’의 행복을 넘어서라는 것이었지요. 저마다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나’들이지만 ‘나’라는 속박에서 벗어나면 세상이 행복해지고 구원받고 해탈하리라.

오래된 브라만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의 핵심 구절은 이렇습니다. “그대는 그저 행위 자체에만 집중할 뿐 그 결과에는 신경 쓰지 말라. 결과를 얻으려고 행위 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아무 행위도 않는 것에 매달리지도 말라.” 내가 성공하려고 내가 칭찬 들으려고 내가 내세에 잘되려고 착한 일 하지 말고 그냥 착한 일 하라는 겁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공자님도 ‘무아(無我)’를 가르침의 으뜸으로 삼으셨지요.

예수님께서도 처음 광야의 유혹 때나 마지막 십자가 위에서 철저히 자신을 버리셨고, 제자들에게도 당신을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라 하셨지요.

이 존재의 세상에 하나의 존재로 나타난 이 삼라만상들은 존재와 비존재를 넘어선 당신에게 돌아가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이 서로 다르게 살아갑니다. ‘존재’는 ‘서로 다름’과 같은 뜻을 지닌 다른 말입니다. 우리는 존재하는 한 서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존재의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서로 다른 생각과 이해관계를 잘 조정하는 좋은 법과 제도, 좋은 대표들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종당에는 이 서로 다름, 나를 넘어서서 또 다른 나들을 받아들일 일입니다. 이걸 자비요 사랑이라 부르던가요.

참 어렵지요.

글 김형태 변호사· <공동선> 발행인

*이 시리즈는 <공동선>과 함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