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동선 2017년 2월호에 나는 “태극기 집회를 그저 바라만 보시는 하느님”이란 제목으로 글을 썼었습니다. 지금 윤석열 탄핵을 격하게 반대하는 이들이 널려 있듯이 그때도 그랬지요. 우리 어머니는 그때나 지금이나 “아니 저런 태극기 노인들이 난리를 치는 세상을 그대로 두고 보시냐”며 하느님을 원망하시지요. 그런데 무한하신 당신께서는 이 세상을 그대로 바라만 보심으로 음과 양을, 선과 악을 다 품어 안으시는 분이라고 노자께서 말씀하셨잖아요. “道常無爲而無不爲(도상무위이무불위)” 아무 것도 함이 없으시되 하지 않음도 없으시다는 거죠.
예수님도 전지전능한 힘으로 악인들을 응징하거나 모조리 착한 사람으로 바꾸어 버리는 기적을 일으키지 않고 그저 사랑을 가르치시고 종내에는 십자가 형벌에 이르기까지 “나”를 버리심으로 모든 걸 다 이루신 거죠. 그런데 당신의 그 긴 호흡을 감당하기에는 우리 삶이 너무 짧고, 당신의 그 기묘한 이치를 이해하기에는 우리의 욕심이 너무 많으니, 유한한 우리는 그저 선과 악, 옳고 그름을 다 품어 안는 당신 사랑을 할 수 있는 데까지 흉내 내어 볼 뿐.
뭐, 이런 글을 썼던 건데 안 신부님이 ‘변호사 글 잘 봤어’ 하셨던 거죠. 선종하시기 얼마 전에도 신부님이 전화를 걸어와 한참 동안 이 불의한 세상을 걱정하셨더랬지요.
나의 영세와 혼배성사를 주례하셨던 신부님과의 긴 인연은 명동성당 지하 입관 예절로 끝이 났습니다. 벽에 가려서 유리관에 누워계신 신부님 구두만 보였어요. 신부님은 저 구두 신고 여기저기 다니며 이 땅에 정의와 평화의 하느님 나라를 세우려고 노심초사 하시다가 이제 한 줌 흙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장례 미사 때 주교님께서 이런 미사 통상문 기도를 바쳤습니다.
“인자하신 아버지, 자녀인 저희가 하느님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그 배필이신 성 요셉과 사도들과 그 밖의 모든 성인과 함께 아버지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받아 누리게 하소서.” 주교님은 안 신부님이 이문동 본당 주임신부이실 때 보좌신부를 하셨었지요. 그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는 이 기도대로 안 신부님이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실 거라 위안을 받았습니다.
다른 종파 종교인들도 “나”의 이 세상 삶의 다음에 “나”의 또다른 삶이 계속될 거란 믿음에 터잡아 신앙생활을 합니다. 모든 종교의 주제는 바로 “나”에서 비롯되는 거죠. 그러기에 과학이 아무리 발전하여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해 모든 걸 다 알게 된다 해도 “나”의 문제를 다루는 종교는 절대로 없어질 수가 없는 겁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세상이 어떻게 생겨있으며 나는 누구인가’ 하는 두 가지 근원적인 물음의 답을 찾으려고 애써 왔습니다. 처음에는 종교가 이 물음 모두에 대해 답을 하려 시도했지만 인지가 발달하면서 차츰 철학, 과학으로 분화되어 각기 그 영역을 분명히 하게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철학은 제가 만학의 왕이라고 큰소리쳤었지만 이제는 과학과 종교에 그 지위를 완전히 넘겨주어 설 자리가 전혀 없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아직까지도 아리스토텔레스며 칸트, 헤겔, 하이데거에 매달려 있는 이들을 보면 참으로 딱합니다.
이 세상이 어떻게 생겨있는지는 과학이 거의 다 밝혀 가고 있습니다. 우주가 한점 빅뱅에서 출발해서 수소, 헬륨 순으로 원소들이 생겨나고, 인력 때문에 집산을 거듭하여 별이 생기고, 단세포 생명체가 생기고, 진화를 통해 인류가 등장하고, 그 인류는 이제 인공지능 AI까지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습니다. 생명체가 신경조직을 통해 외부세계를 인식해서 ‘개념’이 생기고 ‘판단’, ‘추론’으로 인지기능이 발전해 가는 과정을 아리스토텔레스며 데카르트, 칸트는 어렵게 그리고 틀리게 설명했지요.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0과 1의 차이에 기초한 반도체라는 물질을 가지고 사람 뇌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추론’까지 하는, ‘사유하는 연장(延長)’ AI를 만들어 낸 거죠. 생각과 물질은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철학과 종교의 가르침이 완전히 무너진 겁니다. 생각이 물질에서 비롯되었음을 AI가 너무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는 거죠. 인공지능의 생각하는 능력은 머지않아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특이점을 넘어서게 되고 인간의 통제를 훌쩍 벗어날 때가 오겠죠. 이 세상이 어떻게 생겨있는지를 알려 하는 과학은 이제 거의 그 끝에 다다른 듯도 합니다.

그런데 이 과학이 전혀 다룰 수 없는 영역이 바로 “나”의 문제입니다. 모든 생명은 “나의 유지”라는 생존본능을 가지고 있지요. 종교란 바로 이 “나의 유지”, “나의 의미”를 찾는 일입니다. 종교들이 내세우는 영생이며 윤회, 해탈이 바로 그 답입니다. 반면에 AI는 아무리 사람보다 더 뛰어난 지적 눙력을 가지게 된다 해도 “나”가 없습니다. “나”는 생존본능의 기초인 싫고 좋음을 느끼는 데서부터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오온(五蘊) 중 첫 번째인 ‘수’가 바로 싫고(Dukha), 좋음(Adukha)을 뜻합니다. AI는 싫고 좋음의 귀속주체인 “나”가 없습니다. 물론 AI에게도 동물 훈련시킬 때 쓰는 ‘보상’이라는 체계를 만들어 학습이 가능하도록 하고 있지만, 이 보상체계는 AI에 고유하게 귀속되어 있는 게 아니므로 생명체의 싫고 좋음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처럼 AI는 근본적으로 “나”가 없다는 점에서 인간과 질적으로 다르고 종교도 가질 수 없겠죠.
종교는 이 “나”가 개체 “나”를 벗어나 전체에 귀의하려는 노력입니다. 그리고 여러 종교의 스승님들은 개체 “나”가 나에게 좋고 싫은 것에만 목을 매는 이기심을 벗어나야만 비로소 전체에 귀의할 수 있다고 가르치십니다.
그 길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이 개체 “나”들이 서로 연기(緣起)되어 있음을 철저히 깨달아 알아 “나”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지혜의 길, 이런 지혜의 길을 걸을 능력이 안 되어도 다른 개체들을 잘 대해주는, 착한 일을 열심히 하는 행위의 길, 그리고 나를 철저히 낮추어 전체이신 당신과 이웃에게 나를 바치는 헌신의 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안 신부님이 다른 모든 성인과 함께 아버지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받아 누리게 하소서’ 하고 기도했지만, 개체 안 신부님이 죽은 뒤에도 다시 살아나 개체의 삶을 유지하는 게 영원한 생명을 뜻하는 게 아님은 바티칸 공의회를 기초한 칼 라너 신부님이 분명히 가르쳐 주셨지요.
그렇습니다. 이 개체 “나”의 영원한 생명을 바라는 이기심을 벗어나, 전체이신 당신과 이웃에 철저히 엎드리는 게 바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가르쳐 주셨죠.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김형태 변호사(공동선 편집인)
*이 시리즈는 김형태 변호사가 발간하는 격월간 공동선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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