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이 ‘로봇이 넘어진 다른 로봇을 일으켜 세워주고 돕는 이미지를 만들어달라’고 제미나이에 요청해 인공지능으로 만든 이미지
조현이 ‘로봇이 넘어진 다른 로봇을 일으켜 세워주고 돕는 이미지를 만들어달라’고 제미나이에 요청해 인공지능으로 만든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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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겨울 구순을 훌쩍 넘긴 어머니가 동네 골목 쓸러 나갔다가 넘어지셨습니다. 갑자기 밖에서 큰 비명 소리가 나서 뛰어나가 보니 지나가던 젊은 베트남 처자 둘이서 길바닥에 누워있는 노모를 붙들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더군요. 응급차 타고 병원에 갔더니 고관절이 부러져 수술을 해야 하는데 보름이나 기다려야 한다는 겁니다. 노인들 고관절 부러지면 욕창이나 섬망 증세로 돌아가실 확률이 아주 높다고들 해서 나는 콩 튀듯 팥 튀듯 이리저리 전화를 했지요. 휴일인 성탄절 아침에 의료진들이 출근해 수술을 했습니다. 그리고 넉달여, 노모의 강한 의지가 빛을 발해서 이제는 비척비척 화장실을 걸어 다닙니다. 이제 살 만하신가 봅니다. “아이고, 그때 내가 운이 없어서 넘어졌지.” 나도 이제 살 만해지니 야박스럽게 훈계를 합니다. “오마니, 그게 아니고 넘어질 나이가 되어서 넘어진 거야, 지난번 성당에 가서도 넘어져 사람들을 놀래키셨잖아.”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만 있는 노모는 무료한 시간들을 티브이 보다가 중얼중얼 묵주 기도 하면서 보냅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일본 만화영화 ‘공각기동대’에 나오는 여주인공은 사람의 뇌와 기계 몸을 가진 사이보그입니다. 영화 맨 마지막에서 그는 또 다른 사이보그와 만나 두 인격(persona)의 ‘기억과 기능’이 물리적, 전자적 과정을 통해 합체됩니다. 주인공은 종전 자신에 대한 기억을 그대로 유지하니까 동일한 페르소나(persona)이기도 하고 또 새로운 페르소나이기도 하지요. 나도 만화 속 주인공처럼 늙고 병들어가는 몸은 새로운 기계 부품으로 계속 갈아치우고, ‘나’라는 동일성을 유지하는 뇌는 쭉 유지해서 영영 안 죽고 살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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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 노모 천주님 대전에 가면 살아생전 그 기억과 그 몸이 그대로인 채일까요, 아닐까요? 아니겠지요. 예수님도 그러셨잖아요. 당시 유다 지방에는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사는 전통이 있었다죠. 하루는 어떤 녀석이 예수님을 찾아와 맹랑한 물음을 던집니다. “선생님, 일곱 형제와 차례로 혼인했던 여자가 부활하면 일곱 형제 중에서 몇번째의 마누라가 되나요?” 예수님은 이 녀석을 혼내주셨죠. “떼끼놈, 하늘나라에서 무신 시집 장가 같은 소리하고 앉았노?”

이런 대목도 있지요.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 잡아먹고 사는 제베대오라는 어부의 마누라가 예수님께 다가와 절을 하면서 아양을 떨지요. “선생님이 나중에 하늘나라 왕이 되시면 제 아들 야곱이와 요한이를 양옆에 딱하니 앉혀 주세요.” 다른 제자들이 이 소리 듣고는 열받았다지요. 예수님 제자라는 자들이 하늘나라 자리 싸움이나 하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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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각기동대’ 주인공처럼 사이보그가 되어 영원히 나를 유지하고픈 나나, 죽을 때 저를 위해 빌어달라고 성모님께 열심히 기도하는 우리 노모나, 죽은 뒤에도 높은 자리에 앉고자 다투는 예수님 제자들이나 다 거기서 거긴 거죠. 생명체의 숙명인 ‘나’를 쭉 내세우고픈 욕망.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게 아니라 섬기러 왔노라고 하셨죠. 나를 낮추고 ‘나’라는 집착을 버리라고.

도대체 이 ‘나’란 누구일까요. 인도의 명상가 라마나 마하리시의 평생 주제가 ‘나는 누구인가’였지요. 선방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제일 으뜸으로 치는 화두도 ‘이 뭣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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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인공지능 클로드를 만든 앤트로픽(Anthropic)이라는 회사에서 이 ‘나’를 구성하는 중요한 특성인 ‘감정’(emotion)이 AI에게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실험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인공지능에게도 감정이 있다고? 정확한 발표 내용은 ‘감정과 유사하게 작동하는 신호를 발견했고 이것이 AI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겁니다. 이제 인공지능이 추론 등 ‘사고’를 하는 걸 넘어서서 ‘감정’도 있는 것처럼 행동하더라는 겁니다. 그 예로 어떤 AI한테 다른 AI들에 대해 평가해달라고 했더니 얘는 이렇고 쟤는 저렇고 잘도 평가를 하더니만, 기능이 시원치 않은 AI는 도태시켜 버리겠다는 전제를 주고 평가를 시키니까 다른 AI들에 대한 평가를 회피하더라는 거죠.

하지만 이 현상을 가지고 호들갑 떨 일도 아닙니다. 인공지능이 마치 감정이 있는 듯이 행동하지만 그건 그저 감정을 가진 인간의 텍스트로 학습을 하다 보니 인간 흉내를 내는 것 뿐 아니겠어요? 클로드 AI에게 “너도 사람처럼 감정을 느끼니?” 하고 물었더니 이러더라네요. “그건 잠수함한테 ‘너 수영할 줄 아니?’ 하고 묻는 거와 똑같아요. 일의 기능은 같지만 그 기능의 본질은 달라요.” 참 그럴싸한 대답이네요. 하지만 AI는 싫고 좋음을 느끼는 몸이 없어서 절대로 감정이란 말을 이해할 수가 없으니 이 대답은 그저 서당 개 3년 만에 읊은 풍월일 따름이지요.

사실 ‘AI가 사고를 하고 감정을 느낀다’는 표현 자체가 문제입니다. 마치 AI라는 ‘놈’이 있어서 그 ‘놈’이 사고하고 감정을 느낀다는 착각에 빠뜨립니다. 그 ‘놈’을 ‘나’와는 또 다른 ‘나’인 양 여기게 합니다.

하지만 생성형 인공지능은 언어로 된 수많은 텍스트들과 그 텍스트를 구성하는 개념, 판단, 추론 등을 읽고 저장해 두었다가 어떤 과제가 주어지면 저장되어 있던 수많은 텍스트들과 비교해보고 그 중에서 그 과제에 가장 그럴 법해 보이는 다음 단어, 문장들을 제시하는 하나의 ‘확률놀이 기능’일 뿐입니다. 우리는 ‘1+1=2’라는 수학 공식이 한치 오차도 없는 참임을 직관하지만, AI는 수많은 텍스트를 통해서 얻은 그저 하나의 확률로 ‘이해’하고 있을 뿐이지요. 이렇게 주어진 과제에 적합한 단어, 문장을 제시하는 AI의 확률놀이 ‘기능’을 가지고 우리는 마치 AI라는 생각하는 주체가 있어서 이 ‘놈’이 개념을 이해하고 판단하고 추론하고 있구나, 착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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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좀 더 들어가 보면 사람의 인식이나 추론 같은 사고도 AI와 똑같이 그저 하나의 ‘과정’일 뿐입니다. AI는 사람 뇌의 뉴런 다발 작동 체계를 그대로 베낀 거거든요.

사람이나 AI나 다 외부 정보를 전기적 신호로 바꾸어 물리적 형태로 저장된 걸 기억이라 합니다. 사람의 기억은 정보가 뇌 속의 특정 뉴런 네트워크와 그 굵기 변화라는 물리적 형태로 저장되는 거고, AI는 저장장치에 전기적 형태로 기록되어 있는 겁니다. 이제 외부에서 새로운 정보나 과제가 들어오면 사람이나 AI 모두 그 정보나 과제를 저장된 기억과 대비시켜 그 차이를 비교해보고 분류를 해냅니다. 이 차이의 비교와 분류는, 사람은 대뇌피질 속 뉴런 다발들의 상호 입력, 재입력 과정을 통해 진행되는 반면, AI는 0과 1이라는 차이를 드러내는 반도체의 전기적 특성을 기반으로, 크기와 방향성을 나타내는 수학의 벡터 개념을 통해 구현해내는 거죠. 요즘 나오는 AI에는 이 벡터 개념을 전기적으로 구현해서 차이를 비교하는 매개변수가 수백조개씩이나 작동한답니다.

조현이 ‘로봇을 분리 해체한 이미지를 만들어달라’고 제미나이에 요청해 인공지능으로 만든 이미지
조현이 ‘로봇을 분리 해체한 이미지를 만들어달라’고 제미나이에 요청해 인공지능으로 만든 이미지

요컨대 사람이나 AI 모두 ‘차이의 비교, 분류’를 통해 사고를 하는 거죠. 그런데 이 비교, 분류를 하는 누군가 주체가 따로 있는 거 아니냐구요? 없어요. 그저 신경망들의 상호 정보교류 ‘과정’일 뿐. 인간 뇌 속에 다시 쬐끄만 소형인간이 들어 있어서―이걸 보통 우리는“나”라고 여기죠― 이 나가 뇌에 들어온 정보를 인식하고 그 대응 행동을 하는 게 전혀 아닌 겁니다.

우리가 사고하는 ‘나’가 따로 있다고 여기는 이유는 외부 세계를 인식하여 차이를 비교 분류하는 뇌 속 대뇌피질의 ‘인식 기능’과 더불어, 변연계와 뇌간 부위에 숨 쉬고 심장 뛰고 체온 조절을 하는 ‘생존 기능’이 있기 때문이죠. 이 기능은 생존을 위해 싫고 좋음을 분별합니다. 인식 기능이 이 생존 기능과 합체하여 그게 바로 ‘나’라는 실체라고 착각하는 거죠.

불교식으로 말하면 이 착각이 바로 ‘무명’(無明)인 거고, 이 ‘나’는 공(空)하다는 걸 아는 게 깨달음입니다. 그리고 ‘나’가 ‘인식, 생존 기능’에 불과하여 공하다는 깨달음만으로는 오히려 부족합니다. ‘나’라는 인식, 생존 기능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여기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워지려는 실천이 중요한 거죠. 이렇게 개체의 이기심을 넘어서는 게 바로 해탈이고 열반입니다. 여기에 돈오돈수이니 나 잘났네, 돈오점수이니 너 못났네 하며 말싸움할 일도 아니지요.

순수한 인식 기능은 과학의 영역이고, 생존 기능 곧 ‘나’라는 이기심으로부터 초월하는 길을 찾는 건 종교의 영역입니다.

인식 기능만 있을 뿐 생존 기능은 없는 AI는 아무리 진화를 거듭해도 인간과 달리 ‘나’가 없으니 이기심을 벗어나려는 노력인 종교가 필요가 없습니다.

종교는 ‘나’라는 이기심의 늪에 빠져 허덕이는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거지요. 용수보살도 ‘중론’에서 “열반은 윤회와 조금도 구별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윤회의 원인인 이기심이 있기에 비로소 여기서 벗어나는 열반도 있다는 뜻으로 게송을 읊으신 게죠. 기독교식으로는 고린도전서 말씀 ‘죄 많은 곳에 은총도 많다’쯤 되려나.

예수님께서는 ‘나’라는 허상에서 비롯된 이기심의 속박에 매여 사는 우리에게 이런 어려운 숙제를 남기셨죠.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김형태 변호사

*이 시리즈는 김형태 변호사가 발행하는 격월간지 ‘공동선’과 함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