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이 들어 할 일 없는 백수들과 낮술을 했지요. 빈대떡에 소주 마시고 그만 헤어지자는 친구들을 억지로 생맥줏집에 끌고 갔더니 아직 영업 시작 전이라네요. 별수 없이 혼자 책방엘 가서 시집을 집어 들었는데 거기서 본 연애시에 눈이 번쩍 뜨이고 마음이 울렁거렸습니다.
“어느 해 봄 그늘 술자리였던가 그때 햇살이 쏟아졌던가 무너지며 햇살 아래 헝클어져 있었던가 아닌가 다만 마음을 놓아 보낸 기억은 없다/ 마음들끼리 서로 마주보았던가 아니었는가 팔 없이 안을 수 있는 것이 있어 너를 안았던가 너는 경계 없는 봄 그늘이었는가/ 마음은 길을 잃고 저 혼자 몽생취사하길 바랐으나 가는 것이 문제였던가, 그래서 갔던 길마저 헝끌어뜨리며 왔는가 마음아/ 나 마음을 보내지 않았다 더는 취하지 않아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길이 날 묶어 더 이상 안녕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나 더 이상 안녕하지도 않았다/ 봄 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나 울었던가 울기를 그만두고 다시 걸었던가 나 마음을 놓아 보낸 기억만 없다 사랑한다는 말 없이 사랑을 말하기”
허수경 시인의 ‘불취불귀(不醉不歸)’란 시였습니다. 꿈속에 살다가 취한 채 죽기를 바랐던 20대 후반 시절 시인은 봄 그늘 술자리에서 애인과 헤어졌나 봅니다.
그리고 봄 그늘 아래서 얼굴 묻고 울었던가? 울기를 그만두고 더는 취하지 않아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불취불귀의 길을 다시 걸었던가? ‘사랑한다는 말없이 사랑을 말하’던 참 좋은 시절이었네요.
나는 낮술에 취한 김에 시인의 시집들을 보이는 대로 다 집어 들었지요. 그는 아파서 죽기 전 50대 중반에 쓴 ‘빙하기의 역’이란 시에서 희로애락의 삶을 이렇게 돌아보더군요.
“내 속의 할머니가 물었다, 어디에 있었어?/ 내 속의 아주머니가 물었다, 무심하게 살지 그랬니?/ 내 속의 아가씨가 물었다, 연애를 세기말처럼 하기도 했어?/ 내 속의 계집애가 물었다, 파꽃처럼 어린 나비를 보러 시베리아에 간 적도 있었니?/ 내 속의 고아가 물었다, 어디 슬펐어?/…/ 내 속의 신생아가 물었다, 언제 다시 만나?/ 내 속의 노인이 답했다, 꽃다발을 든 네 입술이 어떤 사랑에 정직해질 때면/ 내 속의 태아가 답했다, 잘 가”
공자님 손자인 자사가 쓴 중용의 저 유명한 구절이 떠올랐어요. “희노애락이 아직 발현되지 않은 순수한 상태를 중(中)이라 하고(희노애락지미발 위지중·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발현되었으되 절도에 맞는 걸 화(和)라 하느니라(발이계중절 위지화·發而皆中節 謂之和).”
그런데 도대체 사람에게 희노애락이 발현되지 않은 상태라는 게 가능하기나 한가요? 빅뱅으로 이 세상이 생겨났다는 건 개체, 유(有), 있음이 시작되었다는 거고, 이 ‘있음’의 세상에서 생명체가 생겨났다는 건 자기보존의 본능이 시작되었다는 겁니다. 생명체인 사람이 생겨난 이래 도저히 떨칠 수 없는 자기보존 본능 때문에 우리는 애인과 술 마시며 놀 때엔 기쁘고 즐겁지만 헤어지면 화나고 슬픕니다. 희노애락이 발현되지 않은 상태란 이 세상의 개체에 불과한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거죠. 자기보존 본능이란 바다에서 잠시 솟구쳐 오른 물결이 “내가 내다”하고 소리 지르는 건데, 우리가 물결인 이상 어쩔 수 없는 거겠죠. 그런데도 옛 스승들이 무슨 뜻으로 기쁨과 화남, 슬픔과 즐거움을 넘어선 ‘中’을 이야기한 걸까요. 그리고 희노애락의 삶을 ‘中節’에 맞추는 ‘和’를 가르친 걸까요.
불가에서는 이런 중(中)의 상태를 부모에게서 나기 전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 하던가요. 하지만 나는 부모의 결합으로 생긴 유전자의 일시적 결과물일 뿐이니 어디 별도의 내가 본래부터 있었던 건 아닐 터. 그러니 중이나 본래면목이란, 그런 상태가 어디 따로 있어서 이를 찾으라는 게 아니라, 바로 나의 생존본능을 객관적으로 바라봄으로써 그 본능의 굴레에서 자유로워지는 걸 말하는 거겠지요. 나는 바다에서 잠시 솟구쳐 오른 물결이고 다시 바다로 돌아간다는 걸 알고 “내가 내다” 소리치는 걸 그만 두는 것. 이게 바로 희노애락을 살아가면서도 그에 매몰되지 않고 중절에 맞추어 화(和)를 이루는 걸 겁니다.
젊은 시절 시인은 봄 그늘 아래서 애인과 헤어져 올 수도 갈 수도 없는 길을 울며 걸었더랬습니다. 그러다가 아파서 바다로 돌아갈 때가 되자 나이를 거슬러 어린 시절로 돌아가면서 차례로 자신에게 묻습니다. ‘너 어디 있었니, 무심하게 살지 그랬니, 연애를 세기말처럼 해봤니, 나비 보러 시베리아 가봤니.’그리고 마침내는 태아였던 자신에게 이르러 “잘 가”하고 스스로에게 작별인사를 합니다.

시인은 물결 하나로 희노애락의 삶을 살아내다가 마침내 본래면목의 바다로 돌아간 거겠지요.
그날 나는 황동규 근작 시집도 샀습니다. 그가 20대 시절 쓴 연애시 ‘즐거운 편지’란 시는 영화에도 인용되어서 널리 알려졌지요.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가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이제 80대가 되어 쓴 ‘간월암 가는 길’이란 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더군요.
“간월암은 지척이겠지. 허나/ 밀물 들면 오늘 건너갈 수는 없지 않겠나./ 소주잔을 입에 대며 나는 딴 생각을 했다. 반 시간쯤 전 간월암 같이 가자고 수인사를 나눈/ 술상 건너편에 앉아 있는 자의 법명/ 원도였던가, 원두였던가?/ 그가 술잔을 내들었다 그냥 내려놓고 이마 찌푸리며 말했다./ ‘무명승이라고 하시게/…/ 나는 그만 가네. 산은 없어도 산신각(山神閣) 있는 간월. 한번쯤 들어가 두리번댈 만하이’”
황동규 시인도 20대 사랑 편지에서 80대 간월암 가는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날 서가들 사이를 어슬렁거리다가 주자학자인 율곡이 주자학에서 이단이라 칭한 ‘노자 도덕경’을 해설한 ‘순언(醇言)’이란 책도 얻어걸렸지요. 순수한 말씀이란 뜻의 ‘순언’. 율곡은 노자를 이렇게 평합니다.
“여기서 하는 말이 대부분 학자들이 도달해야 할 것이기는 하지만 걸핏하면 성인을 칭하면서도 위로 천리(天理)에 달하는 논의가 대부분이고 아래로 인사(人事)에 대해 배우는 논의가 적으니, 최상의 선비가 보기에는 마땅하지만 중간 이하의 자질을 가진 선비라면 손대기조차 곤란하다. 다만 자신의 사욕을 극복하고 인욕을 막고 고요함과 무거움으로 자신을 지키며 겸허로 자신을 기르고 자애와 검소함으로 백성을 다스린다는 뜻에 대한 설명은 모두 친절하고 재미가 있어 배우는 자들에게 유익하니 성인이 남긴 책이 아니라고 하여 아무도 보지 않아서는 안된다.”
당시에는 ‘노자 도덕경’을 ‘성인’ 공자님이 남긴 책이 아니라 하여 배척한 헛똑똑이들이 많았다는 소리네요.
그날 친구들과의 낮술 뒤 책방을 돌아다닌 일의 결말은 이랬습니다. 김용옥 교수가 쓴 ‘도올 주역 계사전’이 비닐랩에 쌓인 채 서가에 놓여있더군요. 사람들이 책은 안 사고 내용만 뒤적여 보고 그냥 가는 걸 막으려고 그런 모양인데 도올 선생 참 야박도 하셔라. 투덜대고는 거금을 들여 덜퍽 집어 들고 왔는데 다음날 술이 깨어서 보니 어디서 많이 본 책 디자인이더라구요.
아뿔사, 부랴부랴 서재에 달려가서 보니 똑같은 책이 꽂혀 있더군요. 술 취해서 얼마 전 산 책을 또 산 거죠.
그뿐이 아니었어요. 이번에 산 허수경 시인의 ‘불취불귀’란 시가 실린 ‘혼자 가는 먼 집’이란 시집도 또 한권이 떡하니 꽂혀 있더라구요.
이렇게 나의 낮술 책방 순례기는 화려하게 끝이 났답니다.
김형태 변호사
*이 시리즈는 김형태 변호사가 발행하는 격월간 ‘공동선’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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