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속해서 꺼낼 쓸 수 있는 나르시시즘의 저장고란 없다. ‘만족’은 일시적이며 영구히 보존할 수 없다.” <나르시시즘의 고통> 이졸데 카림
35살 지혁씨는 광고회사 팀장이다. 매사에 실수가 없고 믿음직한 사람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동료의 칭찬에 “아, 뭘요”라며 시큰둥하게 웃어넘기지만, “김 팀장님이 하면 다르다”는 상사의 반응에는 밤샌 수고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보람을 느낀다. 상사의 칭찬과 인정은 지혁씨의 회사 생활에 큰 원동력이다. 상사는 광고 업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 카피와 성공적인 다수의 캠페인을 런칭한 실력자였다. 그런 상사로부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음을 인정받는 건 단순한 평가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인정받는 순간만큼은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상사가 자신을 좋게 봐주면 자신감과 우월감이 차올랐고, 상사의 표정이 냉담하거나 관심 없어 보이면 마음 한구석이 금세 불안해졌다. 상사의 말은 지혁씨에게 자신을 비춰주는 거울 같았다. 지혁씨에게 상사는 단순한 롤 모델이 아니었다. 닮고 싶은 미래의 모습이자, 언젠가 갖고 싶은 이상적인 커리어였다. 하지만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거나 스스로를 돌아볼 때면 ‘나는 저 사람만큼 될 수 있을까?’하는 절망감과 열등감이 교차했다.
며칠 전, 새로운 클라이언트의 광고 기획안을 발표하던 날이었다. 열심히 듣던 상사는 “김 팀장, 기획안이 완벽하긴 한데, 이번에는 조금 덜 완벽해도 되지 않을까?”라며 알쏭달쏭한 반응을 보였다. 퇴근길 내내 지혁씨는 ‘덜 완벽해도 된다’는 말이 무슨 뜻일지 한참 생각했다. ‘덜 완벽하라니, 과했다는 뜻인가? 아니면 기대에 못 미쳤다는 건가?’ 공들여 만든 자료라 자신 있었는데, 그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집에 도착해 노트북을 켜니, 상사가 보낸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김 팀장, 오늘 고생 많았어요. 새로운 클라이언트는 첫 작업이니 선택안이 많을수록 오히려 고르기 어려울 겁니다. 좋은 아이디어라 버리기 아쉽지만 시안을 두 개로 정리해보죠.” 그제서야 지혁씨는 안도할 수 있었다. 당장 시안을 추려 보기 좋게 정리하고, 늦은 밤인데도 수정본을 메일로 보냈다. 상사는 평소 빠른 피드백을 칭찬하는 사람이었다. ‘내일 아침 메일을 보면, 역시 김 팀장이야, 하겠지?’ 생각하니 마음이 놓였다. 노트북을 덮고 늦은 시간을 확인하자, 다 했다는 성취감 뒤로 알 수 없는 공허함이 몰려왔다. ‘신입사원도 아닌데, 상사의 칭찬이 있어야만 자존감이 올라가다니 어린애 같네! ’싶어 마음이 씁쓸했다. 상사의 말 한마디에 ‘우쭐’하거나 ‘어쩔 줄’ 몰라 하는 자신이 연약하게 느껴졌다. 상사의 인정이 고마우면서도, 그 칭찬과 격려에 기대고 의존하는 자신이 불편했다. ‘괜찮은’ 존재로 확인받기 위해 계속해서 고군분투하는 느낌들, 그것이 지혁씨가 상사와 관계 맺는 방식이었다. 지혁씨가 상사를 대하는 태도는 정신분석가 코헛의 ‘자기대상(selfobject)’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자기대상’이란 ‘나의 심리적 기능을 대신 수행해주는 존재’로, 나를 반영하고 감싸주며 내게 필요한 자기감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대상을 말한다.
내면의 안정감을 지탱해주는 타인
‘자기대상’은 정신분석가 하인즈 코헛이 제안한 개념으로, ‘자기(self)’의 심리적 기능을 대신 수행하는 ‘대상(object)’을 뜻한다. 코헛은 모든 인간이 ‘자기감(sense of self: 내가 나라는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타인의 반영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자기대상’은 단순한 타인이 아니라, 나의 일관성과 응집력, 내면의 안정감을 지탱해주는 심리적 존재다. 건강한 자기애를 발달시킬 수 있도록 ‘자기대상’은 나에게 칭찬과 감탄을 보내고, 내가 ‘괜찮은 존재’라는 확신과 ‘특별하고 유일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공급해준다. 유아기에는 대부분 부모가 첫 번째 ‘자기대상’이 된다. 아이가 성장해 가면서 새로운 능력을 드러내고 칭찬을 받고자 할 때, 눈을 맞추며 뭘 해도 잘했다고 “우리 아기 잘했네”, “멋지다” 칭찬해주는 대상이 있을 때, 아기는 ‘내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감각을 갖는다. ‘자기대상’을 경험하는 것은 아기가 스스로 완전한 존재가 되기 전에 반드시 필요한 발달적 경험이다.

우리가 타인에게 기대하고 경험하는 ‘자기대상’의 역할과 유형은 다음과 같다.
‘자기대상’의 유형
1. 반영적 자기대상(mirroring selfobject)
“너는 멋진 사람이야”, “네가 자랑스러워”라고 감탄하며 반응해주는 대상으로, 자신을 온전하고 가치 있는 사람이라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이러한 감정 반영과 접촉이 부족하면, 칭찬에 과민하거나 인정 중독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다.
2. 이상화 자기대상 (idealizable selfobject)
“너는 나처럼 완벽하다”는 느낌을 주는, 강력한 힘을 가진 절대적인 존재. 부모, 스승, 리더 등 강하고 완전해 보이는 인물을 이상화하여 의지함으로써 이상적 가치와 심리적 안정감을 얻는다. 이 경험이 결핍되면, 권위있는 인물을 무조건 부정하거나 반대로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극단적 형태를 취할 수 있다.
3. 쌍둥이 자기대상 (alter-ego selfobject)
“나와 너는 닮았어”라는 유사성의 경험을 주는 관계로, 비슷한 생각과 감정을 공유하는 친구와 동료, 연인과의 관계를 통해 소속감과 동질감을 느낀다. 이 ‘같음’을 통해 자기감이 안정되고 창조적 재능과 공감, 유머가 발전한다.

병리적 자기애 vs 건강한 자기애
자기애는 단순한 유아적 퇴행이나 병리적 상태가 아니라, 인간 발달에 필수적인 요소다. 코헛은 인간의 일생을 ‘자기애가 성숙해가는 과정’으로 보았다. 병리적 자기애와 건강한 자기애의 차이는 자기감을 어떻게 유지하는가로 볼 수 있다. 이 차이는 타인과 자신을 구별하는 수 있는 능력의 발달과도 관련되어 있다. 병리적 자기애는 ‘타인의 시선을 통해 내가 존재한다’라면, 건강한 자기애는 ‘나는 나로서, 타인은 타인으로서 구별되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병리적 자기애는 자기의 안정감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외부의 인정, 칭찬, 감탄을 필요로 하는, 자기애적으로 취약한 상태다. 이는 충분치 못했던 ‘자기대상’ 경험에서 비롯되어 타인의 말과 시선에 의존하게 만든다. 타인의 반응이 자기 존재의 지표이고 자기확신이 외부로부터 오기 때문에, 비판이나 무관심에 과도하게 민감하다. ‘완벽하고 특별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는 믿음 속에서 결점이나 실패를 인정하지 못하고, 수치심을 견디기 어렵다. 또한 타인을 독립된 인격이 아닌, 자신을 비춰주는 거울이나 자기애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도구로 여긴다. 상대가 자신과 다르게 느끼거나 판단할 때는 분노와 배신감을 느끼며 통제하려 한다. 겉으로는 자신감 있고 우월해 보이지만, 내면에는 ‘나는 무가치한 존재일지 모른다’는 불안과 공허함이 도사리고 있다.
반대로 건강한 자기애는 ‘자기대상’의 기능이 충분히 내면화되어 있는 상태다. 즉, 타인의 인정이 없어도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기본적인 확신을 유지할 수 있다. 외부의 칭찬이 사라져도 스스로를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는 내적 목소리가 존재한다. 자신의 실패와 결점을 수용하고, 완벽하지 않아도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고 느낀다. 이들은 타인을 자신의 확장된 자기애적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서로 다른 존재로 인정한다. 칭찬이나 사랑을 받으면 기쁘지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타인의 시선을 빌리지 않고도 내면의 시선으로 자신을 안정감 있게 바라볼 수 있는데, 이는 내가 나에게 필요한 말을 스스로 해줄 수 있는 능력, 즉 내면화된 ‘자기대상’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남에게 듣고 싶은 말을 나에게 해주기
충분한 ‘자기대상’ 경험은 모두에게 필요하다. 코헛은 자기애를 채워줄 ‘자기대상’을 필요로하지 않는, 성숙한 인간은 많지 않다고 말했다. 최초의 가장 중요한 ‘자기대상’이 부모라면, 성장하면서 가깝고 소중한 형제자매, 친구, 연인, 직장 동료뿐 아니라 인형이나 반려동물 등이 주요한 ‘자기대상’이 될 수 있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나를 반영하고, 감탄하고, 닮아 있는 경험을 제공한다. 적절한 ‘자기대상’을 내 곁에 두는 것은 건강한 자기애를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기반이다.
하지만 타인의 인정과 칭찬을 계속해서 찾아 헤매는 중이라면, 잠시 멈추어 “내가 진짜로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우리가 남들에게 듣고 싶은 말은 대개, 스스로에게 해주고 싶지만 차마 하지 못한 말이다. ‘괜찮은 존재’라는 확신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지혁씨처럼, 가장 듣고 싶지만 가장 하기 어려운 말이 무엇인지 천천히 떠올려보자. 타인을 통한 자기애는 쉽게 휘발되고 끊임없이 공급받아야 유지된다. 내가 나에게 필요한 말을 스스로 해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나에게 꽤 든든한 내 편이 될 수 있다. 쉽지 않더라도, 내가 경험했던 좋은 ‘자기대상’을 내 안으로 옮겨오는 일은 의미있는 시도가 될 것이다.☞나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돕는 질문들을 기사 원문에서 읽어보세요! https://www.hani.co.kr/arti/society/health/1228964.html?h=s
오늘의 용어: 자기대상(selfobject)
정신분석가 하인즈 코헛이 제안한 개념으로, ‘자기대상’은 자기(self)의 심리적 기능을 대신 수행하는 대상(object)을 뜻한다. 즉, 나 자신은 아니지만 완전히 분리된 외부 인물도 아닌, 나의 일부처럼 경험되는 타자이자 존재다. 코헛은 자기애적 요구와 필요성을 충족시켜주는 대상을 ‘자기대상’이라 불렀다. 유아는 ‘자기대상’을 통해 발달에 필요한 수용과 감당할 수 있는 좌절을 경험하면서 타인과 자기를 구별하는 방법을 배우고 그 과정을 통해 건강한 자기애가 발달한다.
하인즈 코헛은 1913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빈 대학교 의과 학위를 받은 후 미국으로 이주하여 시카고 정신분석연구소에서 활동했다. 1964년 미국정신분석학회 회장에 취임했으며, 프로이트의 충동이론을 대체하는 새로운 틀로 ‘자기심리학self psychology’를 제시했다. 코헛은 ‘자기대상’의 표기를, 1971년 ‘자기-대상(self-object)’에서 1978년 ‘자기대상(selfobject)’으로 바꾸며 하이픈을 제거했는데, 그 이유는 ‘자기대상’이 ‘나와 구별되는 외부 대상’이라기보다 ‘나를 위해 존재하는 타자’로서 자기의 확장으로 경험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노은정의 현대인을 위한 정신분석사전은?
개인이 느끼는 일상의 정서와 감정에는 무의식적인 모순과 억압된 기억, 문화적 압박과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뒤섞여 있습니다. 때문에 잘 이해하기는 어려웠던 마음을 돌보는 일은 나를 힘들게 하는 감정을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모호하고 낯선 마음에 하나씩 이름을 붙여보는 노은정의 현대인을 위한 정신분석사전(https://www.hani.co.kr/arti/SERIES/3316?h=s)을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에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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