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제 자본시장에서 일어나는 대형 빅딜들을 복기하다보면, 전통적인 재무 교과서의 관점으로는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순간을 자주 마주하게 된다. 본업과 시너지를 찾기 어려운 이종 업종의 기업을 높은 프리미엄을 주고 인수하거나, 만성적 적자에 허덕이며 막대한 채무를 짊어진 매물을 수천억원의 자금을 동원해 사들이는 행위다.
시장의 단기적 시선은 이를 두고 ‘경영자의 무모한 모험’이라거나 ‘승자의 저주’라는 꼬리표를 붙이기 일쑤다. 하지만 넓고 긴 안목으로 지형 변화를 읽는 전략가들의 머릿속에는 장부 바깥에 숨겨진, 하지만 향후 기업의 운명과 판도를 바꿀 ‘보이지 않는 자산’(Invisible Asset)에 대한 치밀한 계산이 작동하고 있다.
1. 이너서클로 향하는 입장권: 건설·제조 자본의 언론사 인수
최근 수년간 국내 인수·합병(M&A) 시장에서 독특하면서도 지속적으로 관측된 흐름 중 하나는, 건설·부동산·제조 기반 중견그룹들의 레거시(전통) 언론사 인수 행렬이다. 이데일리를 인수한 케이지(KG)그룹을 필두로, 호반그룹은 서울신문을, 중흥그룹은 헤럴드경제를, 유진그룹은 와이티엔(YTN)을, 동화기업은 한국일보를 각각 품에 안았거나 지배적 영향력을 확보했다.
광고시장이 디지털로 급격히 재편되고 종이매체의 영향력이 예전만 못한 상황에서, 이 기업들이 미디어산업 자체의 높은 영업이익률이나 현금창출력을 기대하고 천문학적 자금을 투입했을 리는 만무하다. 이들이 막대한 인수대금을 지급한 진짜 이유는 지면이나 브라운관 위에 적힌 재무적 수익이 아니라, 언론사 소유권이 가져다주는 ‘사회적 영향력’과 ‘대한민국 엘리트 네트워크로의 진입’이다.
“특정 언론사의 사주가 된다는 것 자체가 정계든 업계든 ‘이너서클’에서 상당한 장점으로 작용하며, 업계 내 위상을 완전히 바꾸어놓는다”는 언론산업 관계자의 토로는 미디어 M&A의 본질을 정확히 관통한다. 규제 산업이나 관급 공사, 대관(對官) 평판이 본업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는 기업들에는 언론 자산이 일종의 강력한 ‘전략적 보험’이자 방어기제로 작용한다.
2. 거장과의 네트워크: 삼익악기가 탐낸 상징자본
글로벌 자본시장의 복판에서도 상징자본을 획득하기 위한 기업가들의 치열한 우회전략이 펼쳐진다. 국내 최대의 악기 제조사인 삼익악기가 세계 최고의 피아노 제조사인 ‘스타인웨이앤드선스’(Steinway & Sons)를 인수하기 위해 펼쳤던 수년간의 드라마가 대표적이다.
삼익악기는 스타인웨이를 손에 넣기 위해 부지런히 지분을 매입해 2010년 봄에는 지분율을 30%대까지 끌어올렸고, 경영권 개입이 가능한 클래스A 주식의 인수 계약까지 체결하며 합병의 9부 능선을 넘은 바 있다. 비록 미국의 대형 사모펀드가 막판 인수전에 뛰어들면서 자금 사정 등의 이유로 2013년 최종 인수를 포기해야 했지만, 삼익악기는 매입했던 지분을 전량 매각하며 5년간 쏟아부은 853억원의 두 배에 가까운 1635억원을 회수했다.
장부상으로는 훌륭한 재무적투자 성공 사례로 기록됐지만, 이 거래를 심층적으로 복기한 자본시장 전문가들의 시선은 손익계산서 너머의 지점을 향한다. 스타인웨이의 대주주 혹은 사주가 된다는 것은 카네기홀을 비롯한 전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거장들의 음악회에 최고 귀빈으로 초대받는 권리를 뜻한다. 그 화려한 리셉션 자리에 모여드는 글로벌 정재계의 주요 인사들(VIP), 문화계 거물 및 자산가들과 자연스럽게 한 테이블에 앉아 최고급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는 ‘지상 최고의 마법 티켓’을 쥐는 것과 같다. 삼익악기라는 동양의 제조사가 그토록 집요하게 스타인웨이의 문을 두드렸던 숨은 동기는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세계 문화 권력의 핵심 이너서클에 자사의 깃발을 꽂으려던, 즉 거대한 상징자본을 포섭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3. 국가 기간산업의 무대: 항공사 M&A의 역설
전세계 항공업의 역사를 거시적으로 살펴보면, 이 산업이 얼마나 리스크에 취약하고 변동성이 극심한지 쉽게 알 수 있다. 유가의 급등락, 환율 변동, 지정학적 안보 위기, 그리고 최근의 글로벌 감염병 사태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외풍에 흔들린다. 일본의 국적 항공사들이 재무적 파산 위기에 직면해 정부의 대대적 공적자금 수혈을 받아 연명하고, 미국 내 대형 항공사들도 챕터11 파산보호 절차를 수시로 드나들었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그럼에도 왜 HDC현대산업개발이나 호반건설 같은 한국의 거대 재벌기업은 막대한 재무적 부담을 무릅쓰고 항공업 진출에 관심을 가질까?
항공사는 단순히 승객과 화물을 나르는 운송사업체가 아니다. 국경을 넘나들며 국가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날아다니는 영토’이자 국가 기간산업이며, 외교·안보의 핵심 인프라다. 국적 항공사를 보유한 그룹의 회장은 국가적 위기 상황이나 경제·외교 사절단이 소집될 때 언제나 정부 최고위층과 한 테이블에 마주 앉아 정책을 논하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독점적 지위를 부여받는다. 대기업들이 항공사 인수에 뛰어드는 숨은 목적은 단순한 분기별 영업이익이나 현금창출력이 아니라, 국가경제의 핵심을 장악해 얻는 대체 불가능한 ‘전략적 발언권’과 ‘정치경제학적 지위’인 것이다.
4. M&A의 숨겨진 이유: 보이지 않는 전략자산 확보
M&A는 결국 기업이 미래로 나아가는 시간을 사는 행위다. 새 시장을 개척하고, 브랜드 이미지를 쌓아가며, 최고위 네트워크의 링 위에 올라가는 데 걸리는 수십 년의 세월을 단 한 번의 계약으로 앞당기는 마법이다. 진정한 자본시장의 고수는 정면의 숫자를 치밀하게 계산하면서도, 장부 뒤에 숨겨진 무형의 지형도를 동시에 그릴 줄 아는 눈을 가진 사람이다. 인수 계약서의 서명이 끝난 뒤, 언론 지면과 콘서트홀, 그리고 대형 항공기의 퍼스트 클래스 공간에서 값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전략자산이 천천히 진정한 의미를 드러낸다.
반영은 휴맥스해운항공 대표 uokiok11@gmail.com
반영은은 1992년 1월 산업은행 국제금융부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해 2020년 M&A실장까지 주로 M&A와 사모투자펀드 업무를 담당하며 현대건설·하이닉스 등 대형 딜의 매각 자문, 금호아시아나그룹·현대그룹·동부그룹 등 대기업의 구조조정 M&A 업무를 수행했다. 2005~2008년, 2017~2020년 두 차례 산업은행 뉴욕지점장 등으로 근무하며 미국 금융시장에서 M&A 인수금융에 참여하는 등 선진 금융시장을 체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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