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인간은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만족을 추구한다. 18세기 후반부터 20세기에 걸쳐 세계 대다수 지역에서 세습신분제가 철폐되고 전례 없는 경제성장이 이뤄지면서 그런 꿈은 좀 더 가까운 현실이 된 것 같았다. 그러나 부와 자유의 분배는 공평하지 않았고, 착취와 불평등은 국가 내부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잘 짜인 구조와 질서 속에서 더 단단해졌다. 많은 지식인들이 그 이유를 분석하고 실천적 대안을 모색해 왔다.
그러나 세계는 여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인 데다, 그런 세계를 이해하는 인식의 틀과 변혁의 담론조차 서구가 지배해왔다. 왜 그럴까? 더 나은 대안은 없을까? 포르투갈 출신 법사회학자 보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의 2016년 저작 ‘남의 인식론’은 그런 질문에 대한 진지한 탐구이자 답변이다. 산투스는 미국 예일대에서 박사 학위(법사회학)를 받은 뒤 모교인 포르투갈 코임브라대학교 사회연구센터 소장으로 재임 중이며, 세계사회포럼의 핵심 멤버로 활발한 저술·강연을 하고 있다. 국내에 산투스의 책 번역본이 나온 것은 ‘사회 해방과 국가의 재발명’(2022, 갈무리)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남의 인식론’이 말하는 ‘남(南)’은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다. 양차 세계대전과 포스트식민주의 이후 국제사회와 학계에선 경제적 불평등 해소와 개발 문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지구 남반구(저개발국 및 개발도상국)와 북반구(선진국)의 경제적 격차를 설명하는 새로운 개념으로 ‘글로벌 사우스’가 쓰이기 시작했다. 특히 1990년대 들어 냉전 체제가 종식되면서 ‘제3세계’라는 용어 대신 ‘글로벌 사우스’가 남북 격차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글로벌 사우스와 글로벌 노스는 단순한 지리적 개념이 아니라 정치·사회·경제적 관계 속에서 형성된 개념이다. 산투스는 글로벌 사우스가 “자본주의·식민주의·가부장제, 그리고 그것들에 딸린 모든 억압의 무한한 탐욕에 희생돼 온 모든 창조물과 피조물들의 거대한 집합”이라고 말한다. 글로벌 사우스가 전통적인 제3세계 국가들이나 개발도상국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세계적 불평등 구조 속에서 착취당하고 배제된 사람들과 지역, 그들의 역사적·사회적 경험과 그들의 투쟁까지 포괄하는 은유적 개념인 셈이다.
책 제목 ‘남의 인식론’에는 ‘인식론 살해에 맞선 정의’라는 부제가 붙었다. 영어로 쓰인 원제도 같다. 산투스는 서구 근대성이 유일한 보편적 진리를 제공한다는 믿음을 해체하고 다양한 지역과 문화에서 축적된 지식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식론 살해’는 산투스가 서구의 지식 체계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역사 속에서 비서구적 지식과 문화를 배제하고 주변화해온 과정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개념이다. 그리스어로 ‘지식’을 뜻하는 에피스테메(episteme)와 영어에서 ‘살해’를 뜻하는 접미사 사이드(~cide)를 합성해 ‘에피스테미사이드(epistemicide)’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산투스는 이 책에서 세 가지 기본 전제를 제시한다. 첫째, 세계에 대한 이해는 서구가 세계를 이해하는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 둘째, 전 지구적 인지적 정의 없이는 전 지구적 사회적 정의도 있을 수 없다. 셋째,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해방적 변화들은 서구중심적 비판이론이 발전시킨 문법과는 다른 문법과 각본을 따를 수 있으며, 그 같은 다양성은 가치 있게 여겨져야 한다는 것이다.
산투스는 “근대 서구의 사고는 심연적 사고”라고 지적한다. 중심부 사회인 이쪽과 식민지 영토인 저쪽 사이에 선을 긋고 영역을 나누는데, “그 심연적 선들은 국경과 도시를 “문명화된 구역과 야만적 구역으로 분할”하고 “시민과 비시민을 구별”한다. 이런 ‘인지적 부정의’가 “서구 근대의 인식론과 합법성의 본래적 설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조적 불평등에서의 해방과 더 나은 삶을 위한 “정치적 저항은 인식론적 단절을 전제로 한다.” 전 지구적 인지적 정의 없이는 전 지구적 사회적 정의도 있을 수 없다는 선언의 근거다.
산투스는 책의 전반부에서 심연적 사고를 비판한 데 이어, 후반부에선 서구중심적 지식 체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창안한 네 가지 개념으로 대안 담론을 구축해 간다. ‘부재의 사회학’과 ‘출현의 사회학’, ‘지식의 생태학’과 ‘상호문화적 번역’이 그것이다.
부재의 사회학은 서구 근대성이 지식과 실천에 위계를 매기면서 비서구의 가치관과 문화를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만든 과정을 분석한다. 반면 출현의 사회학은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대안적 가능성을 인식하고 강화하는 과정이다.
부재를 재발견하고 정당하게 평가한 것을 바탕으로 제안한 ‘지식의 생태학’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의 모든 관계적 실천에 한 가지 이상의 지식이 함께하며(…), 과학적 지식을 다른 지식들과의 대화라는 더 넓은 맥락에서 활용”하는 걸 의미한다. 이는 “근본적 공존이라는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선형적 시간 개념을 포기해야만 가능”하다. 이때 ‘선형적 시간’은 서구의 경험에 비춰 경제·사회·정치적 발전은 단계적 경로를 따르며 시간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상호문화적 번역’은 서로 다른 지식들 사이에 어떤 유형의 관계가 가능한지를 묻는다. 번역을 가능하게 만드는 사이 공간인 “번역적 접촉지대는 상이한 문화적 생활세계들이 만나고 매개하며 협상하고 충돌하는 사회적 장”이다. 여기에서 누가, 무엇을 무엇으로, 언제,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왜 번역하는가, 라는 질문들은 필연적이다.

산투스는 위 개념들에서 도출되는 질문과 과제들에 대한 답변의 큰 방향을 ‘좋은 삶(부엔 비비르)’에서 찾는다. 그 실천적 도구가 “아래로부터 새로운 형태의 세계시민주의”다. 새로운 세계시민주의는 서구의 소수 집단뿐 아니라 세계의 서발턴(부와 권력의 중심에서 배제되고 억압을 당하는 하위계층)이 동등한 주체이며, 시장중심적 탐욕과 개인주의를 넘어 공존과 연대, 생명이 중심이 되는 세상을 추구한다.
가능할까? 산투스는 “이 책이 급진적 비관주의도 급진적 희망도 아닌, 비극적 낙관주의에 흠뻑 적셔져 있다”고 썼다. 억압적 체제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그 체제가 완전히 승리하는 것도 아니며 “인간의 조건은 역사의 무거운 짐을 더 쉽게 짊어지게 만들 방법을 선택”하는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산투스의 ‘비극적 낙관주의’는 이탈리아 정치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가 한 유명한 격언을 떠올리게 한다. 1920년 4월 그람시는 한 해 전 사회주의 지식인들과 함께 창간한 주간지 ‘새로운 질서(L'Ordine Nuovo)’에서 프랑스 작가이자 사상가 로맹 롤랑의 문장을 차용해 “이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라”고 썼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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