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폐건물로 변해 잊혀가는 광주적십자병원의 모습. 필자 제공
지금은 폐건물로 변해 잊혀가는 광주적십자병원의 모습.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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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전 | 한양대 의대 교수

“사람이 죽어가는데 의사로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 제주 4·3 때, 총을 맞아 살이 썩어가고 파상풍까지 겹친 무장대원을 치료하기 위해 약을 달라고 하자, “양민에게 줄 약도 부족한데 왜 폭도를 열심히 치료하려고 하느냐”는 미군 군의관을 향해 한 의사가 날린 돌직구다. 자칫 무장대 편이라 오해받을 위험을 각오한 이 의사의 결기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1859년 솔페리노 전투의 참혹함을 목격한 앙리 뒤낭은 적십자사 창설을 촉구했고, “부상자나 병자는 국적과 관계없이 인도적으로 수용되고 치료받아야 한다”라는 제네바 협약 제1조가 만들어졌다. 국제 인도법의 권위자 장 픽테는, 1948년 세계의사회가 채택한 “나는 인종, 종교, 국적, 정당 관계 또는 사회적 지위 여하를 초월하여 오직 환자에 대한 나의 의무를 지키겠노라”는 제네바 선언(히포크라테스 선서의 현대적 개정판)이 앙리 뒤낭의 ‘차별금지’ 가치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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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적십자사의 역사에는 미담뿐만 아니라 오욕의 사례도 가득하다. ‘일본 병원사’를 쓴 후쿠나가 하지메 교수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일본적십자사는 육군과 해군이 관장하는 최대 군사협력 의료기관이었고, 심지어 적십자 표시를 단 병원선으로 군인과 군사물자를 운반하다 연합군 포격으로 한척을 제외하고 모두 격침되었다. 일제강점기, ‘국민총력운동’의 하부 조직이었던 ‘애국반’을 조직해 전쟁 지원자금을 강제로 수금하기도 했다.

인요한 전 국민의힘 의원이 보건복지부 산하 공공기관인 대한적십자사 회장으로 선출됐다. 내란을 두둔하고 내란 우두머리의 석방을 요구했던 인사 선출에 분노한 시민단체들의 항의 성명에 대해, 어떤 이들은 계엄이 잘못된 것이라 여기고 국회의원직을 그만두었기에 선출을 비판하는 것은 편협한 진영 논리라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번 선출은 분명히 잘못되었다. 정치적 변절은 차치하더라도 그는 윤석열 정권 때 여당의 일개 당원이 아니었다. “계엄에 (무슨) 이유가 있을 줄 알았다”는 그의 변명은 혁신위원장, 선거대책위원장, 최고위원 등 여당의 핵심 인사였던 사람이 할 말이 아니다. “비상계엄, 김대중 야당 같았으면 포용했을 것”이라는 그의 말 역시 용서에 대한 심각한 오독이다. 무엇보다 가해자가 할 말이 아니다. 그의 선출이 어떻게 내란을 종식하고 국민 화합에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으나, 분명한 것은 하얗게 내린 눈을 뒤집어쓰고 추운 밤을 견디던 이들에겐 불안하고 맥 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아무리 탕평책이라 해도 굳이 적십자사를 정치의 도구로 삼아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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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능하면 일을 맡기는 것이 좋다는 실용론이 있다. 하지만 그가 아니면 하지 못할 적십자사 회장의 역할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어떤 이들은 그의 남북 교류 경험을 이야기한다. 1971년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회담을 연 것도 적십자사였고, 1985년을 시작으로 이산가족 상봉을 이끈 것도 적십자사였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초고령 이산가족의 상봉을 재개하기 위해 또 한번 적십자사의 활약이 필요한 때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북의 아이들이 아스피린 한알이 없어 버드나무 껍질 삶은 물을 들이켜다 고열과 설사로 죽어갈 때,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약을 주겠다”며 북에 굴욕을 강요하고, 무인기를 평양에 보내 국지전을 도발한 윤석열 정권의 핵심 인사가 이제 와서 만나자고 하면 북에서 응답하겠는가?

1980년 광주, 계엄군의 총에 맞고 대검에 찔린 사람들이 실려 온 광주적십자병원 응급실 앞은 서로 먼저 자기 피를 주겠다는 사람들로 붐볐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에도 ‘끝없이’ 긴 헌혈 대기줄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여전히 이들을 불순세력으로 내모는 이들과 단절하지 못하고 있는 정당의 전직 국회의원이자, 또 한번 수많은 시민이 피를 흘릴 뻔한 계엄 앞에서 주저했던 이가 이제 적십자사 회장이 되어 무슨 낯으로 국민에게 헌혈을 독려할 것인가? 최소한의 염치가 있다면, 스스로 그 자리에서 내려오시라. 그리고 남은 삶은 환자 진료에 최선을 다하는 의사로 살며 속죄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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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적십자병원을 배경으로 헌혈의집 안내 펼침막이 보인다. 필자 제공
광주적십자병원을 배경으로 헌혈의집 안내 펼침막이 보인다. 필자 제공

1910년 10월30일, 앙리 뒤낭은 유언장에 “나는 한마리의 개처럼 묻히기를 원한다”는 참담한 문장을 남긴 채, 병원 골방에서 쓸쓸하게 숨을 거두었다. “내 이름으로 나를 기만하지 말라!”는 무언의 항의 아니었을까? 여전히 계엄 잔존 세력이 거리에서 성조기를 흔들며 ‘윤 어게인’을 외치고 있는 2026년, 그것도 6월 민주항쟁의 달, 지금은 폐건물로 변해 잊혀가는 광주적십자병원 응급실 구석에서 앙리 뒤낭이 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