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를 읽어드립니다
0:00
영국 작가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영화화한 ‘오만과 편견’(2006년). 스틸컷
영국 작가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영화화한 ‘오만과 편견’(2006년). 스틸컷
광고

무플보다 악플이 낫다는 유명한 인터넷 격언이 있다. 다들 알다시피 절반만 진실이지만 마치 누구나 관심을 갈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시대에 잘 어울린다. 좋은 댓글인 ‘선플’이 사랑이라면, 나쁜 댓글인 ‘악플’은 미움이고 ‘무플’은 무관심이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겠지만 이 대비는 ‘있다/없다’ 같은 양극성 어휘와는 다르다. 반의어도 종류가 여럿인데 ‘크다/작다’처럼 상대적인 것도 있고 ‘부모/자식’처럼 관계적인 것도 있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꼭 미워하는 것은 아니고 누굴 더 사랑하거나 미워할 수도 있듯 사랑과 미움은 그 사이에 여러 감정의 스펙트럼이 있다. 온 마음을 담은 사랑과 미움은 격정이라는 공통분모가 있기에 애증(愛憎)이라는 복합적 감정으로도 나타난다.

팬이 안티팬으로도 돌아서듯 사랑과 미움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서, 오히려 ‘무심’이나 ‘무관심’이 이런 격정의 반대일 수도 있다. 그리스어 어근을 조합한 영어의 sympathy(sym 함께 + pathy 감정: 호감, 공감, 동감, 동정심)도 antipathy(anti 반대: 반감, 혐오)도 감정이 있음은 매한가지이니, 수많은 채도와 명도로 존재하는 감정들과 양극적으로 대비되어 아무 감정도 없는 apathy(a 없음: 무심, 무감, 무관심)야말로 진정한 반의어인 셈이다.

사랑이든 미움이든 상대에게 감정을 불어넣는 것이므로 empathy(em 안: 감정이입, 공감)도 연결 고리가 생긴다. ‘공감’은 흔히들 좋게 받아들이지만 취사선택이나 편견도 작용하고 과도한 몰입은 판단력을 흐리기에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empathy는 현대에 생긴 조어지만 원래 고전 그리스어 ἐμπάθεια(엠파테이아)의 뜻은 ‘격정’과 ‘편애’이다. 현대 그리스어는 또다시 살짝 바뀌어 ‘원한, 악의, 증오’에 휘둘리는 상태를 일컫는다. 한글로 쓰면 감정(感情)과 감정(憾情: 원망하거나 성내는 마음)은 글자도 같다. 한자 ‘섭섭할 憾’도 ‘느낄 感’에 심방변이 더해졌을 뿐인데 글자에 ‘마음 心’이 거듭 들어가니 부정적인 뜻이 됐다.

광고

‘사랑’은 중세국어로 ‘생각’도 뜻한다. 중세 독일 기사(騎士)의 사랑 노래를 미네장(Minnesang)이라 하는데 minne(사랑) + sang(노래)의 합성어다. 이 Minne는 영어 mind와 뿌리가 같다. 마음과 생각이 없으면 사랑이 아니다. 물론 미움도 마찬가지다. 감정의 방향을 어떻게 돌리느냐에 따라 다르다.

이제 유럽 주요 언어 사전들은 ‘사랑’의 정의에서 남녀를 굳이 안 나타낸다. 1988년판 웹스터 사전에도 ‘love’의 정의에 남녀 얘기는 없다. 여러 언어 사전의 구판은 ‘사랑’ 중에 ‘연정’과 관계된 정의는 ‘남녀’가 명시된 경우도 많았다. 한국어 사전도 딴 언어처럼 넓은 의미의 사랑 또는 부모자식-형제자매 내지 친구 사이의 감정이야 당연히 남녀가 안 나오는데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성적인 감정에서 ‘남녀’ 또는 ‘이성’을 명시해서 문제가 생긴다. 표준국어대사전 ‘사랑’ 항목도 2012년에 이런 세계적 추세를 반영했다가, 아마도 보수적인 여러 집단의 반발 탓인지 2014년에 슬그머니 되돌렸다. 고려대한국어대사전, 연세현대한국어사전, 민중엣센스국어사전, 보리국어사전 모두 ‘남녀’ 명시는 마찬가지다. 딴 사전부터 바꿔도 된다. 일본어 역시 주요 사전의 ‘사랑’에서 ‘남녀’가 나오는 편이다. 사랑의 범위가 넓다는 것을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광고
광고

덴마크어의 재밌는 표현 하나는 ‘좋아하다’를 뜻하는 ‘kunne lide’이다. 동사 lide는 ‘시달리다/고통받다/견디다’, 조동사 kunne는 ‘할 수 있다’이므로 글자 그대로는 ‘견딜/참을 수 있다’를 뜻한다. 뭔가/누군가를 좋아하려면 싫은 것도 적당히 견뎌야 된다는, 혹은 뒤집어 말하면 싫은 것도 적당히 견뎌야 좋아하게 된다는 속뜻일 것이다. 그런데 영어도 like와 love가 다르듯 덴마크어도 kunne lide(좋아하다)와 elske(사랑하다)가 다르다. 좋아하면 싫은 것도 견디지만 사랑하면 싫은 걸 못 견딘다고 다소 심술궂게 풀이해볼 법도 하다. 감정 상태를 따져보면 ‘좋아하다’는 비교적 잔잔한 반면 ‘사랑하다’는 몹시 거칠고 사나운 너울과도 같다. 두루두루 좋아할 수는 있어도 두루두루 사랑할 수는 없다. 사랑이 깊으니까 모든 걸 견딜 법한데 어쩌면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에는 주인공 남자가 여자를 평하면서 “tolerable”(견딜 만한, 웬만한)이라고 표현한다. 번역본이 많은데 “봐줄 만하다”나 “그만하면 됐다”로도 옮겨진다. 첫인상이 나쁘지는 않아도 매우 좋지는 않았던 주인공 남녀는 우여곡절 끝에 결혼한다. 이 작품의 독일어 번역에서 나오는 표현은 “leidlich”(참을 만한, 어지간한, 그럭저럭 괜찮은)이다. 독일어 leiden(고생하다, 견디다)에서 파생한 이 형용사는 위에 말한 덴마크어 lide와 어원이 같고 뜻도 비슷하다. 첫 만남에서 ‘견딜’ 만큼 딱히 좋은 느낌은 아니었지만 두 주인공은 사랑을 하게 됐다. 하지만 사람의 관계는 늘 순탄치만은 않기에 힘겨운 상황을 함께 ‘견딜’ 순간도 온다.

광고

앞서 말한 여러 감정 어휘의 어근인 그리스어 πάθος(파토스)는 ‘격정, 감정’ 이전에 ‘고통, 수난’이다. 감정은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고 너무 많아도 너무 없어도 곤란하다. 감정이 좋든 나쁘든 잘 다스리고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프랑스어 ‘aimer bien’은 글자 그대로는 ‘잘 사랑하다’지만 격정적인 사랑이 아닌 ‘좋아하다’의 뜻이다. 그러니까 ‘잘 사랑하다’는 감정의 깊이가 그냥 ‘사랑하다’보다 더해야 될 것 같은데 실은 덜하다. 가만 보면 사랑한다고 날뛰는 어느 순간이 값지기도 하겠으나 넓게 멀리 보면 그윽이 좋아하는 게 오히려 잘 사랑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신견식 번역가

신견식 번역가
신견식 번역가

한국외국어대 스페인어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언어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기술·출판 등 다양한 부문의 번역 일을 하며, 여러 미디어 업체와 출판사의 언어 자문 및 감수도 맡는다. 비교언어학, 언어문화 접촉 등 언어와 관련된 다방면의 분야에서 저술 활동을 한다. ‘불안한 남자’, ‘미친 듯 푸른 하늘을 보았다’, ‘언어 공부’, ‘파리덫’ 등을 옮겼고 ‘콩글리시 찬가’, ‘언어의 우주에서 유쾌하게 항해하는 법’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