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총회 참석차 미국을 방문 중인 이재명 대통령이 22일(현지시간) 뉴욕 한 호텔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유엔 총회 참석차 미국을 방문 중인 이재명 대통령이 22일(현지시간) 뉴욕 한 호텔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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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일 | 경제산업부 기자

 범퍼 도색비로 50만원을 달라고 하면 속이 쓰리다. 이 견적이 맞나 싶지만 긁은 게 죄다. 고점에 팔았으면 500만원 벌었다는 아쉬움에 하루에 몇번씩 증권사 앱을 열어봐도 계좌는 채워지지 않는다. 한 증권사는 이 증상을 ‘환상 손실’이라고 진단했다. 고등학교 친구 어머니가 보이스피싱을 당했다. 무려 5천만원이다. 화병이 안 생길 수 없다. 놀랍게도 내 친구는 효자였다. 대출받은 5천만원을 들고 담당 경찰에게 갔다. 돈 찾았다고 말을 맞추고는, 어머니를 불러 돈을 주게 했다고 한다. 이제는 친구가 화병에 걸릴 지경이다. 그때 빚내서 아파트 샀으면 5억원이 올랐다. 다 부질없지만, 나갈 돈 나가고, 생돈 뜯기고, 억대 망상에 빠져도, 일단 계산기부터 두드리는 게 우리가 사는 방식이다.

500조원을 뜯기면 계산이 무의미하다. 일십백천만십만백만천만억…. 일단 0이 몇개인가.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내년도 예산안 규모가 820조9천억원이다. 올해 본예산에 견줘 93조원 늘어난, 역대 최대 슈퍼 예산이다. 500조원이면 복지 예산의 3배가 넘는 돈이다. 국방비의 7배, 교육 예산의 4배다. 삼성전자가 약속한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투자 규모가 425조원, 에스케이(SK)하이닉스는 400조원이다. 500조원으로 대구·경북에도 반도체 공장 짓고, 송전망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 시가 총액으로만 따지면 미국식 자본주의의 상징 코카콜라를 살 수 있는 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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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8일 기자회견에서 미국의 관세 압박 결과물인 3500억달러 대미 투자에 대해 “국민 세금에 해당하는 500조원쯤 되는 돈”이라고 했다. 말이 투자이지 미국이 우리 정부와 기업에서 3500억달러를 뜯어간다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패권이 흔들리자 노골적 조공 요구로 동맹의 순도를 측정하고 돈부터 챙기려 한다. 과거 미국이 북한·이란을 지칭할 때 쓰던 로그 스테이트(rogue state), 깡패 국가 비판이 자신을 향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 대통령은 “안 하고 싶었다”고 했다. 지난 45년간 한국의 대미 직접투자 총액이 2718억달러였다. ‘을사늑약’(김용범 전 청와대 정책실장) 비유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당장 내 돈 나가는 일이 아니어서 체감이 쉽지 않지만, 이 돈이면 국민 삶의 질과 직결된 여러 정책을 그 효과가 나타날 때까지 장기간 유지하고 확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응급실 뺑뺑이로 대표되는 지역 간 의료격차를 줄이기 위한 내년도 지역필수의료 특별회계 재정투자 규모는 1조2614억원이다.

조락의 기운이 느껴지는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대 시장이다. 이 시장에 대한 접근성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수출 1조달러를 눈앞에 둔 한국 경제에는 사활적 문제다. 단순한 완제품 수출이나 현지 공장 건설에서 벗어나, 미국 내 생산·인프라·공급망에 착근해 처음부터 한국을 빼놓고는 법과 제도 설계 자체를 어렵게 만들어야 한다는 조언이 나온다. 이왕 뜯기는 거 투자 구조 설계를 잘해서 장기적으로 우리 몫도 챙기자는 셈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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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미 투자 1호 프로젝트인 텍사스주 가스복합발전 사업에 참여하는 미 에너지기업 넥스트에라 에너지는 지난달 일본의 5500억달러 대미 투자 사업 중 하나인 텍사스·펜실베이니아주 가스발전 사업 관련 계약도 체결했다. 이 기업의 일본 사업 보도자료 3분의 2는 미국법에 따른 온갖 면책 조항으로 채워졌다. ‘합리적 수익을 적시에 회수하지 못할 가능성’ ‘환경 규제 등에 따른 비용 증가’ ‘발전·송전 시설 건설을 일정·예산 내에 완료하지 못할 위험’ ‘부지 선정, 건설, 인허가 관련 위험’ ‘고객 사용량의 성장 정체 또는 감소’ 등 45개 항목이다. 우리 대미 투자 역시 이런 위험을 모두 떠안고 들어간다.

조폭은 처음에는 관리비 명목으로 수익을 갈취하고, 시간이 지나면 강제로 지장을 찍게 해 명의까지 가져간다. 단돈 1달러도 내지 않고 수익 절반을 가져가겠다는 양해각서에 한국의 서명을 받아냈던 미국은, 이제는 일부 사업의 지분 50~90%를 가져가겠다는 요구까지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수천만원짜리 보이스피싱 사기를 쳐도 은행·경찰·금융당국 사칭 시나리오를 촘촘하게 짠다. 반면 덩치만 큰 양아치는 침만 뱉어도 돈을 줄 거라 생각한다. 대미 투자의 수익·손실 여부는 다음 정부 임기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20년간 책임 공방이 벌어질 수 있다. 국민 화병을 줄이려면 정부는 투자 안전장치를 하나라도 더 붙여야 한다. 상업적 합리성이 의심되는 사업을 붙잡아두는 국회 역할이 그래서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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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fic@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