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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미네소타 미니애폴리스에서 지난 24일 이민세관단속국 등의 불법이민 단속 현장에서 시민 알렉스 프리티가 연방요원들에게 제압당해 사살당하기 직전의 장면. 로이터 연합뉴스
미국 미네소타 미니애폴리스에서 지난 24일 이민세관단속국 등의 불법이민 단속 현장에서 시민 알렉스 프리티가 연방요원들에게 제압당해 사살당하기 직전의 장면. 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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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대 | 전 정의당 의원

 마무리를 향해 가고 있는 법원의 내란 재판을 지켜보며, 우리는 결정적인 한가지를 충분히 응시하지 못하고 있다. 재작년 12월3일 내란의 밤, 국회와 선거관리위, 언론사를 향해 출동한 수도방위사령부·특전사령부·방첩사령부·정보사령부의 계엄군은 예외 없이 ‘익명화’되어 있었다. 부대 마크와 개인 명찰은 제거되었고, 안면 마스크와 두건이 착용되었다. 이진우 수방사령관, 곽종근 특전사령관, 여인형 방첩사령관, 문상호 정보사령관은 공히 계엄을 사전 모의하는 단계부터 복장을 중요하게 다루었고, 실제 계엄 선포 직후 첫 지시는 안면 마스크 착용과 특수임무 수행용 흑복 착용이었다.

이상한 일이다. 국가의 정상적 계엄 사무가 질서 유지와 공공 안전을 위한 것이라면, 공권력은 신분을 드러내야 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경찰이 명찰과 배지를 달고 보디캠을 착용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시민이 권력을 식별하고 사후에 책임을 물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날 밤 계엄군은 경찰과 정반대의 선택을 했다. 신분을 숨기고, 얼굴을 가리고, 기록을 지웠다. 이 선택은 우발적이거나 즉흥적인 대응이 아니었다. 사전 모의 단계부터 일관되게 준비된 ‘익명화 전략’이었다. 과거 5·16, 12·12, 5·17 같은 계엄 사태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은폐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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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질문(왜 그들은 자신을 숨겼는가)에 대한 답을 의외의 장소에서 찾았다. 오늘날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과 국경순찰대가 보여주는 모습에서다. 사회학자와 정치학자들은 이들 조직을 정당성 위기에 빠진 형사·사법 체계에 군사적 폭력 논리가 침투한 사례로 분석한다. 핵심은 군사화와 익명화의 결합이다. 최근 미국 내륙 도시에서 벌어지는 이민 단속 현장을 보면, 요원들은 복면이나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기관 식별이 어려운 전술복이나 평상복과 방탄조끼 차림으로 시민을 검문하고 제압한다. 이때 시민이 느끼는 공포는 단순히 무장 때문이 아니다. “저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불확실성,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장 권력과 마주했다는 감각에서 비롯된다.

익명화는 단순한 보호 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책임을 지우는 기술이다. 실제로 미니애폴리스에서 시민에게 치명적 총격을 가한 국경순찰대 요원의 신원은 여전히 확인되지 않았다. 복면, 무명찰, 희미한 패치. 이 조합은 사후 책임 추궁을 구조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는 우발적 남용이 아니라 제도적으로 용인된 무책임의 구조다. 윤석열의 계엄군과 미국 이민단속 요원 사이에는 또 하나의 결정적 공통점이 있다. 행적의 철저한 비밀화, 곧 기록의 부재다. 한국의 계엄 부대들은 계엄의 밤에 작전의 기본이라 할 작전일지를 남기지 않았다. 휴대폰 통화 기록도 삭제했다. 현장 지휘관의 보디캠은 “깜박 잊었다”는 이유로 작동하지 않았고, 합참의 전술지휘통제체계에도 계엄군의 이동은 기록되지 않았다. 국가 권력이 의도적으로 자신의 발자국을 지운 것이다. 사라진 기록 속에서 한국군 계엄 부대는 ‘유령 군단’이었다. 미국에서도 상황은 닮아 있다. 이민 단속 과정에서 벌어지는 폭력 장면이 세상에 드러나는 경우는 거의 예외 없이 시민이 촬영한 휴대전화 영상 덕분이다. 단속국 요원들이 착용한 보디캠 영상은 이상할 정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단속 현장에서 충돌이 발생하는 순간, 일정한 패턴이 반복된다. 시민이 촬영을 시도하면 요원들은 위협을 느끼고 폭력적으로 반응한다. 기록을 남기려는 시민과 기록을 두려워하는 국가 권력의 충돌이다.

이 장면은 낯설지 않다. 계엄의 밤, 국회 앞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수적 우위도 압도적이었지만, 결정적이었던 것은 시민과 기자들이 들고 있던 수백대의 휴대폰이었다. 기록은 계엄군의 폭력성을 억제했고, 익명화된 권력을 다시 현실의 책임 구조 안으로 끌어냈다. 한국에서 계엄이 좌절된 이유는 군이 약해서가 아니라 시민의 기록 능력이 더 강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국과 미국의 길은 갈라진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위태로운 순간에 시민의 힘으로 회복되었다. 반면 미국의 민주주의는 훨씬 더 절망적인 국면에 들어서 있다. 미국에서는 시민을 향한 준군사적 폭력이 이미 구조화되었고, 제도화되었으며, 예산과 인력 확충을 통해 더욱 확대되고 있다. 전쟁터의 논리가 학교와 주차장과 아파트 단지로 옮겨온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중병에 걸려 회복될 가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