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충북 청주시 청주오스코에서 열린 국민의힘 제6차 전당대회에서 당대표 결선투표에 오른 김문수·장동혁 후보가 당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제1야당 대표 선거 결선에 윤석열 전 대통령을 옹호하는 후보 2명이 진출한 건 국민의힘 극우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연합뉴스
22일 충북 청주시 청주오스코에서 열린 국민의힘 제6차 전당대회에서 당대표 결선투표에 오른 김문수·장동혁 후보가 당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제1야당 대표 선거 결선에 윤석열 전 대통령을 옹호하는 후보 2명이 진출한 건 국민의힘 극우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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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수 | 대기자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의 광복절 경축사, “우리나라의 광복을 세계사적 관점에서 보면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승리로 얻은 선물”이란 발언은 뉴라이트 역사관을 반영한다고 비판받지만, 실은 1945년 해방을 바라보는 한국 보수 주류의 시각 위에 정확하게 서 있다. 이런 언급이 처음은 아니며, 1987년 민주화 이전까지 보수 집권세력에서 공공연하게 했던 발언이라는 점은 시사적이다. 일제 강점기에 항일 무장투쟁을 배척했고, 해방 뒤엔 친일파를 온존하며 국가 건설의 주역으로 삼았던 한국 보수의 콤플렉스가 여기엔 배어 있다.

종신 집권을 노리던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1월21일 치안·예비군 관계자 중앙 회의에서 이렇게 훈시했다. “독립운동을 한 분들은 한국의 독립을 그분들의 공로라고 자랑합니다만, 물론 그런 민족적인 정신이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는 것은 높이 찬양할 만하지만, 실제 우리가 해방을 맞이하고 독립을 갖게 된 것은 연합국의 승리로써 우연히 독립의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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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를 이은 신군부 출신의 전두환 대통령도 같은 시각으로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바라봤다. 전두환 대통령은 1981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연합국의 승리와 일본의 패전이라고 하는 민족 외적인 상황이 8·15 광복의 또 하나의 큰 결정적 요인이었음은 모두가 잘 아는 사실입니다. … 우리는 스스로의 과거를 진실 이상으로 미화함으로써 공허한 자존망대에 빠질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자존망대(自尊妄大), 앞뒤 아무런 생각 없이 함부로 잘난 체한다는 뜻이다. 빼앗긴 나라와 주권을 되찾은 날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항일 독립운동 역할을 미화하는 착각에 빠지지 말라는 국가 지도자의 경고는 놀랍지 않은가. 2차 세계대전 직후 한국을 비롯한 수많은 제3세계 국가들의 독립이 연합국 승리에 기반한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국가 지도자가 굳이 ‘과거의 독립운동을 쓸데없이 미화하지 말자’고 말하는 건 또 다른 차원의 정치적 함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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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전두환의 발언은 해방을 바라보는 한국 보수의 인식을 그대로 반영한다. 일제 통치가 오래갈 것으로 보고 일본과 협력해 자치권을 얻는 게 최선이라 생각했던 보수 주류는 ‘갑작스레’ 해방이 되자, 자신의 약점을 감추고 정치적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해방은 연합국의 선물’이라는 외재적 해방론을 강조했다.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 무장투쟁이나 상하이(상해) 임시정부의 무력 활동은 의도적으로 배척하거나 축소했다. 트럼프 1기 때, 북-미 정상회담을 추진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을 비난하면서도, 집회에선 성조기를 자랑스럽게 흔드는 우파 시위대의 모습은 바로 8·15 광복에 관한 본래의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1987년 민주화 이후엔 달라진다. 군부독재 종식 이후, 진보든 보수든 정치 지도자들의 발언에서 더는 “해방은 연합국의 선물”이라는 식의 단선적인 표현은 찾기 어렵다. “1945년 해방은 연합국의 승리에 기반하지만 우리 민족의 지난한 항일 독립투쟁 성과이기도 하다”라는 복합적인 시각이 일반 인식으로 자리 잡았다.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일제하 독립투쟁과 해방 이후 정치 상황을 균형 있게 보려는 생각이 우리 사회에 폭넓게 퍼졌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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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과거로 돌아간 건 윤석열 대통령 때다. 윤 대통령은 집권 이후 2년 동안 광복절 경축사에서 일제의 강제동원과 군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 대신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전체주의가 대결하는 분단의 현실에서 반국가세력과 그 추종 세력에 굴복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김형석 관장의 올해 경축사는 윤 대통령 발언의 연장선 위에 서 있다. 해방 직후의 좌우 대립 상황에서 좌파 척결을 강조하며 보수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항일 독립운동의 가치를 폄훼했던 보수의 인식과 일맥상통한다.

윤 전 대통령은 이미 탄핵됐고, 구속됐다. 김형석씨가 독립기념관장직을 유지하는 것도 그리 길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국민의힘의 극우화 움직임을 보면, 역사 인식을 수십년 전으로 되돌리는 일을 멈추기는커녕 오히려 가속할 가능성이 높다. 국민의힘 당대표 경선에서 이른바 ‘찬탄’(탄핵 찬성) 후보들이 모두 떨어지고 ‘반탄’(탄핵 반대) 후보 2명이 최종 결선에 오른 건 상징적 예시다. 제1야당이 정치뿐 아니라 역사, 문화, 외교 등 모든 분야에서 시계를 거꾸로 돌리며 갈등을 심화하는 화수분 역할을 하는 건 정말 우려스럽다.

pc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