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은 아직 나가사키에 5천명의 군사를 가지고 있고, 대만에서 부대를 철수한 다음에는 조선과 해보려고 한다. 프랑스·미국은 조선과 지난번의 사건(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을 아직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만큼 아무래도 병선을 가지고 일본을 도와줄 것이다.”
대만 유사사태가 곧 한반도 안보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는 국가적 재난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조선이 깨닫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전인 1874년 여름께였다. 이 모든 일은 3년 전 작은 사건에서 시작됐다. 청·일 모두에 조공하던 류큐 왕국(지금의 오키나와)의 부속 도서인 미야코지마의 사람들을 태운 배가 1871년 10월 표류 끝에 대만섬 북쪽에 도착했다. 외부 침입에 놀란 대만 원주민(번족)들이 이들을 공격해 무려 54명이 숨지는 참사가 발생했다.
일본의 메이지 정부는 호시탐탐 노려오던 류큐를 자국 영토에 편입하려는 공작에 이 사건을 활용하기로 마음먹는다. “사망한 류큐 사람들은 일본 국민”이라고 주장하면서 1874년 5월 대만 정벌에 나선 것이다. 근대 국가 일본이 처음 감행한 해외 출병이었다.
이 과정을 눈 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청은 크게 당황했다. 이들이 곧바로 떠올린 것은 조선의 안위였다. 청의 외교부였던 총리각국사무아문과, 대만 문제 교섭을 위해 일본으로 파견된 선바오전(심보정, 1820~1879) 대신은 조선에 서한을 보내 이 위협에 당신들 홀로 맞서기 어려우니 “프랑스·미국과 통상조약을 맺어” 대비하라고 충고했다.
조선은 8월6일 청 예부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려달라’며 도움을 청하고, 외교문서의 격식 문제로 한동안 외교관계가 끊겨 있던 일본과 관계 개선을 시도한다. 그 최종 결론이 1년 반 뒤인 1876년 2월 체결된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였다. 일본이 대만을 공격한 이른바 대만 유사사태가 여러 연쇄 작용을 거쳐 조선의 개항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한반도와 대만의 안보가 한 덩어리로 묶여 있다는 사실은 이후로도 거듭 확인돼왔다. 1950년 여름 6·25가 터지자 사오위린(1909~1984) 주한 중화민국(대만)대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국 등이 한국을 지원하면 “공산당이 바다를 건너 대만을 침공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반대 상황이 발생한다면,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 대만 문제는 ‘셰셰’로 넘기기 힘든 고통스러운 난제임은 틀림없다.
길윤형 논설위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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