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3월16일 오후 일본 도쿄 총리 관저에서 기시다 후미오 총리와 의장대 사열을 하며 양국 국기에 예를 갖추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3월16일 오후 일본 도쿄 총리 관저에서 기시다 후미오 총리와 의장대 사열을 하며 양국 국기에 예를 갖추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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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윤형 | 논설위원

 “아베 (신조) 총리의 의도는 (한국과) 정치적 갈등을 통해 개헌과 재집권으로 가려는 것이다. 이것은 경제적·정치적 침략이지 한쪽만 강조해선 안 된다. (일본과의 현재 갈등은) 과거 역사와 관련되어 있고 미래의 정치와도 관련되어 있다.”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이 자신이 쏟아냈던 이 처절한 발언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내 뇌리엔 분명히 남아 있다. 대법원의 2018년 10월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판결과 그에 맞선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배제 등 보복 조처로 한-일 갈등이 극에 달했던 2019년 8월8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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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최고위원은 이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가 주최한 제64차 통일전략포럼 ‘한일 관계, 어떻게 풀어야 하나?’에 나와 일본에 대해 품고 있는 불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에 국가와 정권의 명운이 걸려 있다고 말했다. “이 문제에 국가의 명운이 걸려 있고, 이것을 잘 해결하느냐에 따라 정권의 명운이 걸려 있다. 아베 정권에서 누군가 ‘문재인 정권을 갈아치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면, 저는 결국 이 문제는 아베 정권이 물러나는 것으로 끝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당시 이 발언에 큰 충격을 받아 2021년 펴낸 책 ‘신냉전 한일전’에서 김 최고위원이 ‘음모론적 오해’에 기초해 잘못된 주장을 펴고 있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하지만 5년이란 세월이 지나 윤석열 정부의 끊임없는 ‘패악질’을 지켜봐야 하는 지금에 이르고 보니, 한-일 갈등의 고통스러운 ‘본질’을 이처럼 정확히 짚어낸 분석도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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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싸움은 한·일 두 나라의 과거(역사)와 미래, 즉 ‘모든 것’을 건 존재론적 싸움이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꺾인 것은 아베가 아닌 문재인 정부였고, 그 결과 우리는 역사를 잊고(대법 판결에 대한 일방적 양보안, 사도광산 외교 참사),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을 스스로 부정하며(건국절, 일제강점기 국적 논란), 미-일 동맹의 하위 파트너로 코가 꿰여 군사협력(캠프 데이비드 선언)에 내몰리는 상황에 이르게 됐다.

좀 더 시야를 넓혀 보면, 냉전이 끝나가던 1980년대 말 한·일 앞엔 두 갈래 길이 열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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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는 ‘김대중의 길’이었다. 이는 한·일이 진정한 우정을 쌓아가기 위해 일본이 지난 과오에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1998년 한-일 파트너십 선언)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길이었고, 냉전의 ‘고통스러운 유산’인 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불편한 상대와도 적극 대화에 나서는 용기 있는 길이었다. 이 정신에 따라 김 전 대통령은 2000년 6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일본 총리는 2002년 9월 각각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에 나섰다. 평화는 곧 손에 잡히는 듯 보였다.

이 흐름을 가로막은 것은 ‘아베의 길’이었다. 아베는 김정일 위원장이 사죄한 일본인 ‘납치 문제’를 적극 내세워 이제 막 시작된 북-일 국교 정상화의 싹을 잘라냈다. 2012년 말 권좌에 복귀한 뒤엔 전쟁과 관계없는 세대에게 더 이상 “사죄의 숙명을 지울 수 없다”는 아베 담화(2015)를 발표했고, 힘으로 중국의 부상을 억제하고 북한을 포위하겠다는 ‘적극적 평화주의’와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 구상을 내세웠다.

한·일의 운명이 걸린 결정적 승부처는 2019년 2월 말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이었다. 아베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귀를 붙들어, 남북 관계를 개선하고 북-미 대화를 촉진해 동아시아의 냉전 구도를 허물려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아킬레스건을 끊었다. 이어 그해 7월 문재인 정부를 상대로 화이트리스트 배제라는 거친 보복에 나섰다.

이 패배는 김대중 노선의 파산으로 이어졌다. 이후 단 하루도 마음으로부터 즐거웠던 적이 없다. 그 결과 등장한 윤석열 정부는 아베가 꿈꿨던 질서를 한국에 적극 이식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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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중요한 것은 한국 국민이 아닌 “일본의 마음”(김태효 국가안보실 제1차장)이며, 우리가 해결해야 할 시대적 과제는 미·일의 전략관을 맹종하며 ‘신냉전’의 최전선에 소총 들고 뛰어드는 것이 됐다. 이는 세뇌된 ‘식민지인의 마음가짐’이라 평가할 수 있는데, 윤석열 정부를 이보다 더 잘 묘사하는 표현을 달리 떠올리기 힘들다. 우리가 알던 대한민국은, 어디로 갔는가.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charism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