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해온 프로젝트 결과물을 한데 모아 만든 이미지(포토샵과 인공지능 챗지피티 사용). 본인 제공
지금까지 해온 프로젝트 결과물을 한데 모아 만든 이미지(포토샵과 인공지능 챗지피티 사용). 본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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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을 해서 돈을 벌고,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보람도 얻습니다. 지금 한국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일 이야기를 ‘월급사실주의’ 동인 소설가들이 만나 듣고 글로 전합니다.

‘일하는 사람의 초상’의 인터뷰이로 브랜드 마케터를 소개받았을 때, 평소 접해보지 못한 영역에서 일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생각에 설렜다. 한편으로 걱정도 됐다. ‘시장’(Market)에 ‘-ing’가 붙은 단어라는 것 외에는 마케팅에 관한 지식이 없어서였다. 시장을 관찰하며 인간의 욕구를 파악하고, 그에 맞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될까. 관련 서적도 몇권 읽었는데 책장을 넘길수록 유독 ‘기억’이란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소비자인 나는 ‘필요’뿐 아니라 경험 속에서 형성된 기억에 이끌려 상품이나 서비스를 선택하기도 한다. 그러니 어쩌면 마케팅은 그런 ‘기억’을 남기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단어의 잔상을 품은 채 유월의 어느 금요일 저녁, 서울 마포구 연남동에서 장현희씨를 만났다. 대화를 나눌 만한 카페를 찾아 길을 걷는데 그가 순간 멈칫하더니 향수 매장 쇼윈도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연신 아쉽다고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자 픽셀 아트 폰트로 채워진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미니멀하고 세련된 모노톤의 인테리어 속에서 유독 이질적으로 보이는 그 포스터를 보며, 무심히 지나칠 풍경 속 작은 어긋남을 알아채는 것이 8년차 브랜드 마케터의 감각이 아닐까 생각했다.

지영 작가가 인공지능 챗지피티에 “다양한 분야의 브랜드 마케터로 일하는 30대 한국인 여성의 모습을 유화풍으로 그려줘”라는 지시어를 입력해 생성한 이미지.
지영 작가가 인공지능 챗지피티에 “다양한 분야의 브랜드 마케터로 일하는 30대 한국인 여성의 모습을 유화풍으로 그려줘”라는 지시어를 입력해 생성한 이미지.

“여러 현장을 경험하고 계속 공부하는데도 제가 하는 일을 정의하기는 쉽지 않아요. 먼저 ‘브랜딩’과 ‘브랜드 마케팅’을 구분해 볼게요. 브랜딩이 ‘나는 이런 존재야’라고 정체성을 정의하는 일이라면, 브랜드 마케팅은 그 정체성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경험하게 만드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제품 기획부터 디자인, 홍보, 고객과의 접점 관리까지 브랜드와 관련된 A부터 Z의 일을 아우르는 거죠. 저는 주로 브랜드 마케팅 영역에서 일하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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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희씨의 설명을 들으니 머릿속에 씨앗 하나가 그려졌다. 브랜딩이 소비자에게 남길 정체성이라는 ‘기억의 씨앗’을 빚어내는 일이라면, 브랜드 마케팅은 그 씨앗을 소비자의 마음에 정성스레 심고 잘 자라게 하는 여정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하는 일을 열정적으로 설명하는 현희씨는 줄곧 마케터의 길만 걸어온 듯 보였으나, 예상과 달리 그의 출발점은 기자였다고 했다. “대학에서 신문방송학과 광고홍보학을 공부했고, 학보사 기자로도 일했어요. 졸업 후 한 방송사 영상 보도 편집국에 입사했는데 현실은 녹록지 않았어요.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화장실마저도 제때 못 갈 만큼 일의 강도가 높아 육체적으로 고단했고, 무엇보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오는 회의감이 컸죠. 몸과 마음 모두 지쳐가던 중에 할머니가 아프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사표를 내고 고향으로 돌아가 할머니 곁을 지키면서 저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어요. 어느 날 병실 티브이(TV)에서 ‘살면서 내가 무얼 좋아하고 잘하는지 고민하는 순간이 온다’는 말을 듣게 됐는데, 그게 마음에 남더라고요. 저는 원래 호기심이 많고 세상 모든 게 다 재미있는 사람이거든요. 이 기질을 온전히 살릴 수 있는 일을 해보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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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희씨는 콘텐츠와 사람을 연결하는 마케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 포털사이트 자회사에 입사했다. 그곳에서 라이브 방송과 웹툰 마케팅 업무를 맡을 기회가 주어지자 그는 주저 없이 새로운 영역으로 뛰어들었다. “제가 영화나 소설, 웹툰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작품이 공개되면 즉시 챙겨 보고 이벤트를 분석하면서 ‘나라면 이렇게 홍보할 텐데’ 하고 메모하곤 했어요. 그 습관 덕분에 팀 막내였음에도 본사 프로젝트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고, 기획했던 일은 큰 성과를 거뒀죠.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뛰어요. 진심으로 좋아하는 일을 할 때 나오는 에너지를 느꼈고, 몸으로 부딪쳐야 비로소 내 것이 되는 배움이 있음을 깨달았어요. 타인의 칭찬도 좋았지만 스스로 만족할 수 있어 더없이 행복했고요.”

그는 잡지사와 무역회사를 거치며 현장에서 마케팅 실무를 차근차근 익혀 갔다. 크리에이터 매니지먼트 기업(MCN)에서는 영상을 즐기다 자연스럽게 소비로 이어지도록 만드는 ‘콘텐츠 커머스’ 영역의 개척자였던 사수를 만나기도 했다. “마케팅의 본질을 가르쳐준 고마운 분이세요. 그분 추천으로 브랜드 내부에서 기획부터 실행까지 모든 업무를 주도적으로 이끄는 ‘인하우스(In-house) 마케팅’을 접히기도 했어요. 그 경험까지 쌓아야 진정한 브랜드 마케터가 될 수 있을 거라 판단해 이직을 결심했고요. 기능성 침구 기업의 브랜드 마케팅 부서로 자리를 옮겨 홈쇼핑 등 다양한 매체를 아우르는 인하우스 업무를 주도했고, 덕분에 마케팅의 전 과정을 조율할 수 있는 시야를 키울 수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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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경험들을 발판으로 현희씨는 ‘애니메이션 아이피(IP·지식재산권) 마케팅’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애니메이션을 좋아하지만, 걱정도 많았어요. 면접 볼 때 대표님께 오히려 질문을 던졌을 정도였죠. ‘제가 이제까지는 눈에 보이는 유형의 제품을 마케팅해 왔는데 갑자기 아이피라는 무형의 가치와 마주하려니 실은 두렵습니다. 저 정말 잘할 수 있을까요?’ 하고요. 고민 끝에 해보자고 마음먹고 아이피가 추구하는 핵심 가치를 팀원들과 함께 정하고, 그에 맞는 슬로건과 스토리를 짜는 것부터 시작했어요.”

그는 ‘스토리텔링을 통한 팬덤 형성’에 주목했다. “소비자는 제품이 아닌 브랜드를 사랑할 때 자발적으로 단골이 되거든요. 이미 확고한 팬덤이 구축된 아이피였기에 신규 고객을 유치하는 대신 기존 팬층을 원동력으로 삼는 역발상 전략을 취했어요. 협업 제안서를 쓸 때도 우리 팬덤과 당신의 브랜드가 만나 상호작용하면 의미 있는 시너지가 날 거라고 설득했습니다.”

당시 회사의 첫 프랜차이즈 협업을 성사시키기 위해 현희씨는 한 치킨 브랜드의 문을 두드렸다. 4개월 내내 차갑게 거절당했으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업무적인 연락에만 머무르지 않고 진심 어린 안부와 응원을 꾸준히 전했다. 그렇게 쌓인 신뢰를 바탕으로 지점 관리에 대한 고민까지 함께 나누며 해결책을 모색했고, 결국 담당자의 마음을 돌려세웠다. “그때 성사된 프로젝트는 이전에 실패했던 ‘치킨 케이크’를 저희 아이피를 입혀 되살리는 일이었어요. 연말을 맞아 ‘아빠가 퇴근길에 사 오던 옛날 통닭’의 따뜻한 레트로 감성을 콘셉트로 잡았고, 박스부터 토퍼, 한정판 띠부씰까지 밤새 직접 디자인하고 기획했어요. 결과가 어땠냐고요? 이틀 만에 준비된 물량이 완판됐답니다.”

브랜드 마케터로서 바삐 달리던 때, 예상치 못하게 현희씨는 잠시 멈춰야 했다. “연차를 거의 쓰지 못할 정도로 일에만 매달리다가 몸을 돌보지 못해 수술까지 받게 됐어요. 육체적 한계와 스트레스가 겹쳐 퇴사를 결정했고, 프리랜서의 길로 접어들었어요.” 안정적인 조직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스스로가 하나의 독립된 브랜드가 되어야 한다는 부담과 불안도 뒤따랐다. “어디에 소속되어 있든 간에, 설령 소속이 없을지라도 하는 일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고 되뇌면서 마음을 다잡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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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희씨가 일할 때 쓰는 작업 노트. 본인 제공
장현희씨가 일할 때 쓰는 작업 노트. 본인 제공

프리랜서가 된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일의 영역을 넓혀 갔다. 신규 브랜드 구축과 기존 브랜드의 리브랜딩을 진행하는 한편, 제품 기획부터 홍보까지 전 과정을 책임지는 ‘올인원 작업’에 주력했다. 조직에 있을 때보다 더 큰 책임감이 따랐지만 그만큼 주도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무대가 열린 셈이었다. “요즘엔 한 초콜릿 브랜드의 신제품 마케팅을 총괄하고 있어요. 콘셉트 기획, 패키지 디자인, 출시 전략 수립은 물론 제품 테스트, 광고 심의 검수, 영상 편집까지 진행하는데 제품의 첫 단추부터 마지막 단추까지 클라이언트와 함께 끼우는 거죠. 제 일이 보고서의 수치나 제품에 반영된 아주 작은 일부로만 남는 듯해서 아쉬울 때가 있었거든요. 아버지가 건축 일을 하시는데 가시적인 결과물을 남기시는 게 부럽기도 했고요. 지금은 달라졌어요. 브랜드의 세계관을 세우고, 그것을 마침내 실존하는 제품으로 구현해 내고 있잖아요. 그러니 제 손끝에서도 견고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한적하던 카페는 인터뷰가 진행되는 사이 사람들로 가득 찼고, 여러 대화가 우리 테이블로 흘러왔다. 녹음이 잘되고 있는지 걱정됐으나 스마트폰 앱의 인공지능 소음 제거 기능을 믿기로 했다. 눈앞의 기술에 다시금 감탄하다 보니, 화제는 불과 몇 초 만에 그럴싸한 결과물을 뽑아내는 인공지능(AI) 시대를 살아가는 브랜드 마케터의 미래로 이어졌다.

“아무래도 어둡게 보는 시선이 많죠. 광고 문구나 이미지는 물론이고 데이터 분석이나 타기팅까지 정교하게 해주니까요. 퍼포먼스 마케팅처럼 효율과 수치에 집중하는 영역은 에이아이가 가장 먼저 대체할 거라고 봐요. 하지만 살아남는 인간 마케터는 분명 있을 거예요. 저는 고객의 목소리인 ‘VOC’를 끝까지 챙기려고 노력해요. 거기에 답이 있다고 보거든요. 에이아이는 수만개의 데이터를 분석하지만, 숫자에 담지 못하는 만족과 불만이 있고 행간에 감춰진 기쁨과 서글픔이 있잖아요. 그 감정들과 마주할 수 있는 건 인간이지 않을까요?

브랜드 마케팅의 본질이 무엇인지 자문할 때가 있어요. 이해와 소통, 그러니까 인간을 이해하고 서로 소통하는 일이 아닐까 해요. 클라이언트의 막연한 꿈을 읽어내고 소비자의 감정에 깊이 공감하는, 대체 불가능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지닌 마케터는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제가 10년, 20년 후에도 브랜드 마케터로 살아가고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하게 확신하는 미래와 단단한 다짐은 있어요. ‘왜’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저만의 철학과 가치를 세상에 증명해 내는 ‘퍼스널 브랜딩’의 삶은 계속될 거라는 확신, 이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겠다는 다짐이에요.”

현희씨가 들려준 이야기를 품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픽셀 아트 폰트로 꾸며진 포스터와 인터뷰 내내 반짝이던 그의 눈빛이 자꾸만 떠올랐다. 마케팅 서적을 읽고 난 뒤 ‘기억’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남았던 이유를 어쩐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시장’(Market)에 ‘-ing’를 더해 생동감을 불어넣는 마케팅의 세계, 그 안에서 소비자의 마음에 오래도록 남을 기억의 씨앗을 심고 마침내 울창한 숲을 가꾸어내는 그의 다정하고 끈기 있는 나날이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지영

지영 l 장편소설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앤솔러지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어제를 기억하는 여덟 개의 방식’, ‘킬러 문항 킬러 킬러’가 있다. 5·18 문학상 신인상, 수림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