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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절로’ 프로그램에 참가한 커플. 대한불교조계종사회복지재단 제공
‘나는 절로’ 프로그램에 참가한 커플. 대한불교조계종사회복지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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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랑 더 이야기하고 싶냐고 물어볼 때마다 저는 계속 똑같이 답했거든요.” 땅거미가 내려앉은 저녁, 경북 김천 직지사 마당으로 난 길목에 은은한 조명이 번졌다. 회색 법복을 맞춰 입은 남자와 여자가 마주 섰다. 여자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마음을 확인했고,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저도 그런 얘기를 했어요. 그쪽이라고.” 오늘 처음 만난 사이라기엔 대화가 너무 자연스러웠다.

인기 연애 예능의 한 장면 같지만 배경이 사찰이라는 점이 다르다. 이 영상은 불교방송(BBS) 유튜브에 공개된 ‘나는 절로’ 행사 일부다. 대한불교조계종사회복지재단(이하 재단)이 주최하는 ‘나는 절로’는 미혼 남녀 스무명 안팎이 1박2일 동안 템플스테이를 하며 인연을 찾는 프로그램이다. ‘부처님 주선 소개팅’이라는 별칭이 붙은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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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절로’ 프로그램에 참여한 청춘 남녀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사회복지재단 제공
‘나는 절로’ 프로그램에 참여한 청춘 남녀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사회복지재단 제공

그동안 대중에게 절은 수행자가 세속의 관계를 내려놓는 단절의 공간으로 각인돼왔다. 그런데 조계종은 그 절을, 청년들이 관계를 다시 배우는 장소로 열어두었다. 출가 수행자의 독신 원칙과 별개로, 재가 청년의 연애·결혼을 사회복지 의제로 끌어안겠다는 선택이다. 고립과 관계 빈곤, 결혼·가족을 둘러싼 불안을 ‘인연’과 공동체의 언어로 다시 풀어보려는 실험에 가깝다.

3일 재단 쪽 설명을 들어보면, 2013년 ‘만남 템플스테이’란 이름으로 시작한 이 행사는 지금까지 누적 48회가 열렸고, 2023년 11월부터는 ‘나는 절로’라는 이름으로 총 14회가 진행됐다. ‘나는 절로’ 기준 누적 신청자는 1만1368명이다. 이 가운데 실제 참가한 인원은 163쌍, 326명으로, 경쟁률은 35 대 1에 달한다. 매칭이 성사된 커플은 69쌍이다. 지난해 두 커플이 결혼했고, 올해도 두 커플이 6월과 10월에 각각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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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강원 속초 신흥사에서 진행한 ‘나는 절로, 신흥사’에서 참가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사회복지재단 제공
지난해 9월 강원 속초 신흥사에서 진행한 ‘나는 절로, 신흥사’에서 참가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사회복지재단 제공
지난해 10월 경북 김천 직지사에서 진행한 ‘나는 절로, 직지사’에서 참가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사회복지재단 제공
지난해 10월 경북 김천 직지사에서 진행한 ‘나는 절로, 직지사’에서 참가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사회복지재단 제공

프로그램은 ‘관계를 천천히 만드는 장치’로 짜였다. 입재식에서 자기소개를 한 뒤 일대일 로테이션 차담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낮에는 사찰 주변 산책 데이트로 호흡을 맞추고, 밤에는 야간 데이트와 스님과의 차담을 거쳐 마음을 정리한다. 마지막에는 커플 매칭으로 각자의 선택을 확인한다. “사찰의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서 깊이 있는 만남과 교류가 이뤄지도록 구성했다”는 게 재단 쪽 설명이다.

이날 기자들과 만난 재단 대표이사 도륜 스님은 “결혼을 전제로 교제 중인 커플도 다섯 커플 정도 된다”고 했다. 도륜 스님은 인기 요인으로 ‘강요하지 않는 분위기’를 꼽았다. “불교는 종교를 강요하지 않는 문화가 있고, 사찰에서 만나면 좋은 인연이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다. 그런 점들이 참가자들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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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절로’ 프로그램에 참여한 커플. 대한불교조계종사회복지재단 제공
‘나는 절로’ 프로그램에 참여한 커플. 대한불교조계종사회복지재단 제공

화제가 된 이유는 사찰에서의 만남이라는 특이함 때문만이 아니다. 술자리 중심 네트워킹이나 프로필 기반 데이팅에 지친 청년들에게, 절은 ‘판단을 잠시 멈추게 하는 공간’으로 작용한다. 함께 공양을 하고 같은 시간에 걷는 구조는 상대를 소비하듯 재단하기보다 ‘시간을 함께 견디며’ 결을 확인하게 하는 것이다.

상징성도 크다. 절은 ‘연애와 가장 먼 곳’이라는 고정관념이 강한 공간이다. 그 절이 만남의 장이 되는 순간, 종교는 낯선 방식으로 사회 문제의 한복판에 선다. 인기 예능 ‘나는 솔로’를 변용한 ‘나는 절로’라는 이름으로 문턱을 낮춘 것도 그 흐름을 가속했다.

‘나는 절로’ 프로그램에 참여한 커플. 대한불교조계종사회복지재단 제공
‘나는 절로’ 프로그램에 참여한 커플. 대한불교조계종사회복지재단 제공

행사 인기가 높아지자 재단은 규모 확대도 검토하고 있다. 도륜 스님은 “각 사찰의 수용 인원에 맞춰 참가 커플 수를 조정하고 있다”며 “예산 문제가 풀리면 개최 횟수를 늘리는 것도 적극 고려하겠다”고 말했다. 프로그램이 ‘희소한 이벤트’에 머물지 않으려면, 현장 운영의 안정성과 사후 관리 체계를 갖추는 일이 전제다.

재단은 올해 ‘나는 절로’ 운영 방향을 ‘지역 중심’으로 전환할 계획이다. 가까운 생활권에서 만난 인연이 실제 관계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판단에서다. 도륜 스님은 “지역에서 참가 인원을 선발해 해당 지역 사찰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오는 3월28~29일 전북 고창 선운사를 시작으로 전국 사찰에서 여섯차례 행사가 예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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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사회복지재단 대표이사 도륜 스님이 3일 서울 종로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한불교조계종사회복지재단 대표이사 도륜 스님이 3일 서울 종로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연령대 확장도 검토 중이다. 도륜 스님은 “지금은 20~30대 위주지만, 올해는 40대가 참가하는 특집 프로그램도 고려하고 있다”며 “결혼 의지가 높은 참가자들을 공정하게 잘 선별해 매칭 성사율이 높아지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국가와 사회, 참여자 모두를 위해 올바른 길이라고 본다”고 덧붙였다.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김민제 기자 summe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