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로라하는 서양 고전철학 연구자이자 아리스토텔레스 전문가인 김재홍 박사. 최근 서구 정치학의 뿌리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정치학>(폴리티카) 번역을 거의 마무리했다고 해 부랴부랴 만났다. 여러 판본을 대조해 탈문 되고 찢긴 부분들을 점검해가며 완성한 번역 분량만 원고지 3000장, 지금 작업중인 주석과 해제에서 방대한 설명을 덧붙일 예정이라서 관련 학계의 관심이 높다.
김 박사는 이달 초 문을 연 광주 전남대 사회통합지원센터 부센터장으로 일하고 있다. 센터장은 김상봉 철학과 교수다. 우리 사회의 갈등 해소를 위한 ‘상생 사회·경제적 모델’을 만들기 위해 광주시가 설립해 전남대에 위탁한 이곳에서 철학자는 무슨 일을 할까?
“사회통합모델을 만들면서 인문학적, 철학적 접근을 해나갈 필요가 있다는 데 공감했습니다. 우선은 회사 경영에 책임지는 윤리적 존재로서 ‘노동자’에 대한 윤리학적, 인문학적 고찰을 하는 것이 과제입니다.”
상생의 윤리학을 앞세우지만, 사실은 정치학과 거리가 멀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윤리학(에티카)과 정치학이 뗄 수 없는 관계였듯이.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핵심 개념은 ‘행복’(에우다이모니아)이었다. 그는 “어떤 삶이 좋은 삶, 행복한 삶인가?”라는 질문을 던졌고, 이는 <정치학>에서 “‘좋은 국가’ ‘좋은 공동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으로 곧장 이전되었다.
“<정치학>과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폴리스를 구성하며 살아가는 동물이다’라고 했고, 이 명제는 ‘인간은 정치적(사회적) 동물이다’로 단순화해 널리 알려진 바 있죠. 개인과 국가의 ‘좋음’이 맞물려야 가장 바람직한 폴리스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우다이모니아’라는 공동의 선을 추구하기 위한 최상의 정치제도를 고민했어요.”
당시 아테네 인구 가운데 17만명은 노예였고, 3~4만명만이 자유인이었다. 외국 출신인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정치에 참여하지 못해 ‘정치평론가’로서 <정치학>을 펼쳤다. 그는 오늘날의 시민적 연대와 비슷한 ‘필리아’(친애·우애)를 중시했다. 스승 플라톤의 <국가>(폴리테이아)와 다른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아카데미아’ 학원에서 20년을 수학했지만 스승과 견해를 달리해 조모조목 반박하기도 했다.
<정치학> 완역 마무리 작업상생모델 만들며 ‘정치학’ 실천“철학함은 인간의 조건”“스승 플라톤은 <국가>에서 정치인이 철인이 돼야 한다며 이상적이면서도 기하학적인 통치방식과 엘리트교육을 강조했고, 귀족사회에 영향을 끼쳤어요.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적 입장은 ‘소셜 데모크라시’로, 공동체 정신과 평등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이 책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폴리스가 가족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자연적인 공동체면서도 ‘정치적인’ 공동체라고 풀이한다. 경제학적 분석까지 나아가 ‘오이코노미카’(가정경영학)를 기반으로 한 재화의 획득과 경제적 문제도 언급했다. 오늘날 경제학의 시초인 셈이다. 그는 자급자족 교환경제로 족하다고 보며, 이윤의 획득이나 돈의 축적을 ‘나쁜 것’으로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마르크스는 둘 다 ‘분배 정의’를 중시했고, 이 때문에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고대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라 일컫기도 했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에 기반했고 무척 상식적인 철학자였다”지만, 번역은 또 다른 문제다.
“고전 번역은 ‘면벽 10년’ 수행한다고 할 만큼 힘이 드는 작업입니다. 그래도 학문의 발전을 위해서는 번역의 엄밀성이 중요합니다. 제 경우 직역에 가깝게 번역하고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책들을 두루 참조합니다.”
김 박사에게 희랍어, 그리스어 원전 독해는 하나의 구도같은 것이었나보다. ‘어떻게 하면 세속적인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궁구한 그는 산사에 처박히기보다 ‘철학’을 택했다. 내적 성찰을 거듭하며 동료들과 함께 국내 서양고전 연구의 산실로 유명한 학문공동체 ‘정암학당’(2000년 설립)에서 연구했다. 단체 설립 이전인 1997년부터 강독모임에 참여해왔고 지금도 이사를 맡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아카데미아’다. 그는 1978년 대학에 입학한 뒤 학교를 떠난 적이 없다. 1989년부터 단국대, 숭실대, 충북대, 한양대, 연세대, 중앙대 등 여러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학벌 중심의 왜곡된 대학 구조의 문제를 느꼈고 김상봉 전남대 교수, 홍훈 연세대 교수 등과 함께 교육단체 ‘학벌 없는 사회’의 운영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대학은 인생에서 마지막 공부를 하는 곳입니다. 인류의 교사인 소크라테스가 남긴 가장 중요한 말은 ‘검토하지 않는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이었는데, 젊었을 때 성찰을 잘못 배우니까 대학 이사장이 ‘목쳐주겠다’는 발언이나 하는 것 아닌가요.”
김 박사는 아리스토텔레스뿐 아니라 노예출신 철학자로 ‘왕보다 더 자유로운 삶’을 살았던 에픽테토스, 철저한 언어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삶을 보면서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찾아들어가려는 그들 삶의 자세에 감동을 받는다”고 했다. 구도자처럼 삶과 사회의 철학에 철저히 몰두하고 싶은 심정을 에둘러 표현한 것처럼 들렸다.
“아리스토텔레스도 <형이상학>에서 ‘인간인 한 철학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철학함이야말로 인간다운 삶의 조건이 아닐까. 이 말을 후배들에게 해주고싶어요.”
광주/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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