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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잉게 숄 지음, 송용구 옮김 평단문화사 펴냄백장미는 지지 않는다-독일의 양심 숄 오누이 잉게 숄 지음, 우치가키 게이이치 옮김 미라이사 펴냄

며칠 전부터 독일 뮌헨에 머물고 있다. 양혜규씨의 초청으로 9월13일 이곳 하우스 데어 쿤스트(예술의 집)에서 강연을 하기 위해서다. 하우스 데어 쿤스트는 1933년에 정권을 잡은 아돌프 히틀러의 지시로 건설됐다. 대표적인 나치스 양식 건축물이다. 기공식은 히틀러가 참석한 가운데 1933년 10월15일 열렸다. 여기서 1937년 제1회 ‘대독일 예술전’이 열렸다. 즉 이 미술관은 나치스 독일의 예술적 국위 선양 상징이었다. 그 미술관에서 내가 ‘디아스포라의 삶’이라는 주제로 프리모 레비, 에드워드 사이드, 그리고 재일조선인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 것이다. 청중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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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에 도착한 다음날 나는 먼저 뮌헨대학에 갔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찾은 이 도시에 처음 온 것은 1984년이었다.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이 도시에 있는 알테 피나코테크(고전미술관)에서 뒤러와 크라나흐의 명작을 보는 것, 레엔바흐 미술관에서 칸딘스키를 보는 게 주요 방문 목적이었다. 이 도시 근교의 다하우에는 나치스가 처음 건설한 강제수용소가 박물관으로 보존되고 있다는 걸 의식하고 있었으나, 솔직히 고백하건대 그때의 나는 그런 장소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한국은 광주 5·18의 기억이 생생한 가운데 군사정권 지배가 이어지고 있었고, 내 형 둘은 석방의 가망도 없이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 숨막히는 현실에서 한순간이나마 바깥세계의 공기를 마시고 싶어서 멀리서 찾아왔는데 기껏 강제수용소나 보러 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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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정돈된 뮌헨 시가를 걷다가 대학 같은 건물 앞을 지나게 됐다. 도로 표지를 보니 ‘게슈비스터 숄 플라츠’(Geschwister-Scholl-Platz)라고 씌어 있었다. ‘숄 오누이 광장’이라는 의미다. 그것이 백장미 저항운동의 중심 멤버였던 한스와 조피를 가리킨다는 걸 금방 알아차렸다. 그들에 관한 기억을 오래 살려두기 위해 그들이 다닌 뮌헨대학 앞 광장에 그런 이름을 붙여 놓은 것이다. “잊지 마라, 눈을 돌리지 마라” 지나가는 길손인 내게도 그렇게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그날 밤 뮌헨 중앙역 근처 허름한 호텔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운 나는 다음날 아침 뭔가에 억지로 이끌리듯 다하우로 향했다. 그 뒤 10여년간 나는 아우슈비츠를 비롯해 여러 강제수용소 유적지들을 찾아다녔는데, 그게 그 시작이었다.

30년 전의 그 기억을 되살리듯 나는 또 이번 뮌헨 체류를 숄 오누이 광장에서 시작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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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장미 사건은 나치스 치하에서 일어났다. 백장미에 참가한 학생들은 프랑스 침공과 동부전선에 종군한 독일 육군 귀환병들이었다. 그들은 폴란드의 유대인 거주지구 상황이나 동부전선의 참상을 목격하고 반전의 결의를 다졌으며, 독일군의 스탈린그라드 전투 패배를 통해 패전을 예감했다. 그들은 1942년부터 1943년까지 6종의 삐라를 만들어 몰래 배포했다. 첫 삐라는 이랬다.

“무엇보다 문화민족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은, 저항도 하지 않고, 무책임하고 맹목적인 충동에 사로잡힌 전제(독재)의 무리에게 ‘통치’를 맡긴 일이다. 지금 실상은, 성실한 독일인 모두가 자신들의 정부를 수치스러워하고 있지 않은가?”

마지막 삐라는 1943년 2월14일과 16일 밤 뮌헨 시내에 뿌려졌는데, 그러고도 남은 것들이 꽤 있었다. 그래서 2월18일 오전 숄 오누이는 대학에 가서 아직 잠겨 있던 강의실 문 앞과 복도에 삐라들을 놓고 마지막 남은 것들을 갖고 3층으로 올라갔다. 조피가 통층으로 트인 홀에 그것을 뿌렸다. 그때 조피는 나치스 당원인 대학 직원에게 발각돼 붙잡혔다. 그 뒤 백장미 멤버들은 게슈타포에게 체포당했고 숄 오누이 외에 크리스토프 프롭스트, 빌리 그라프, 알렉산더 슈모렐 등 3명의 학생과 쿠르트 후버 교수 등 모두 5명이 처형당했다.

마지막 삐라가 뿌려진 넓은 홀에 들어가 보니 거기에는 생물학 관련 국제학회가 열리고 있었고 학생과 젊은 연구자들이 활기차게 오가고 있었다. 그곳 어딘가에 조피 숄을 기념하는 조각이 있을 텐데 그게 어딘지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지나가는 이에게 물어보니 “모른다”며 미안한 듯 영어로 대답했다. “난 영국에서 왔으니까요”라고. 그러고 나서 몇 분 뒤 그 사람 좋아 보이는 인물이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시 내게 와서는 “저기요, 저기” 하고 가르쳐 주었다. 그가 가리킨 한쪽 벽에 조피 숄 흉상이 설치돼 있고 그 벽을 돌아가자 전시실도 있었다. 그들은 아직도 “잊지 마라, 눈을 돌리지 마라” 하고 계속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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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장미는 지지 않는다-독일의 양심 숄 오누이>(한국어판 제목은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는 전쟁 뒤까지 살아남은 한스와 조피 숄 오누이의 누나이자 언니인 잉게가 쓴 회상기다. 일본의 독일문학자 우치가키 게이이치가 1953년에 우연히 독일에서 원서를 입수해 귀국한 뒤 번역한 책이다. 1955년에 초판, 1964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백장미 저항운동에 대해 일본에서는 오늘날까지 많은 문헌들이 간행됐지만 이 책이 처음이었다. 전후 일본에서 민주주의와 평화를 지향하는 젊은이들에겐 필독서였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은 개정판 9쇄로, 1971년 판이다. 그것은 내가 대학 3학년이 된 해, 형들이 한국에서 체포·투옥당한 해다. 당시 나는 조국의 감옥에 갇혀 있던 형들과 다른 수많은 정치범들을 반나치 저항운동에 참여했다가 희생당한 독일 학생들과 겹쳐 함께 상상했다.

숄 오누이와 프롭스트는 롤란트 프라이슬러가 재판장이었던 인민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것을 굳이 ‘재판’이라고 부른다면 그렇다는 얘기다.

조피는 취조당한 뒤에도 잠을 잘 잤고, 인민재판소에서는 배심원들을 향해 “우리 머리는 오늘 떨어지겠지만 당신들 머리도 앞으로 계속 떨어질 거예요” 하고 말했다. 오빠인 한스는 방청하러 온 남동생 어깨에 손을 얹고 “정신 차려. (나는)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어”라고 했다. 그들의 아버지는 반히틀러적인 언동을 했다는 직장 여직원들의 밀고로 징역 4개월을 선고받은 인물이다. 그 아버지는 방청석에서 외쳤다. “아직도 다른 정의가 있어!”

숄 오누이와 프롭스트에게 사형 판결이 내려졌다. “피고는 삐라에서 전시에 무기생산을 사보타주하라고 촉구했고, 우리 민족의 국가사회주의적 생활을 타도하라며 패배주의를 선전했다. 우리 총통을 험하게 욕하고, 국가의 적을 이롭게 하는 짓을 했고, 우리 국방력을 약화시켰다. 이에 따라 사형을 선고한다.”

나치에 맞선 백장미의 한스와 조피 마지막 삐라가 뿌려진 홀의 벽에 조피 숄 흉상이 설치돼 있었다 “잊지 마라, 눈을 돌리지 마라” 아직도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아소가 ‘나치스의 수법’을 배워 헌법을 개정하자고 말하자 청중들은 낄낄대며 반겼다 이 야비함이 파시즘의 온상이다 백장미들을 ‘한없는 고독’으로 몰아간 공기도 이랬을 것이다

세 사람은 바로 그날 참수당했다. 처형을 앞두고 조피는 같은 방 여성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죽는 것 따위 아무렇지도 않아. 우리의 행동이 몇천명의 사람들 마음을 흔들고 깨우칠 거야. 틀림없이 학생들 반란이 일어날거야.”

같은 방 여성은 이렇게 회상했다. “오, 조피. 너는 아직 몰라.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짐승인지를.” 사실 학생반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세 사람 처형 사흘 뒤 대학 강당에 모인 학생중대는 ‘백장미’를 매도하는 학생 지도자 연설에 환호하며 숄 오누이를 게슈타포에게 넘긴 직원을 찬양했다.

일본 자민당은 지금 헌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그 초안의 뼈대는 자위대를 국군으로 바꾸고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억압하며, 외국인의 인권을 명백히 부정하는 내용이다. 현행 헌법의 “고문 및 잔혹한 형벌은, 이를 절대로 금한다”는 조문에서 “절대로”를 삭제한 것이 이 개헌안의 본질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부총리 겸 재무상인 아소 다로는 얼마 전 강연에서 ‘나치스의 수법’을 배워 헌법을 개정하자고 말했다. 청중석의 정치가나 경제인들은 낄낄대고 웃으며 그 말을 반겼다. 이 야비함과 경박함이야말로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파시즘의 온상이다. 하지만 일본 사회에서 아소 발언을 문제 삼는 소리는 미약하다. 일찍이 이 책을 애독한 그 많은 일본인들은 어디로 사라져버린 걸까?

“틀림없이 그때도 이랬을 거야” 하고 나는 생각한다. 백장미 학생들이 살았던 시대, 그들을 “한없는 고독”으로 몰아간 공기도 틀림없이 이랬을 것이다.

“언제가 되면, 도대체 언제 국가는 그 최고의 임무가 그저 몇백만의 이름없는 사람들에게 조그마한 행복을 안겨 주는 것이라는 걸 인정할까? 그리고 언제, 국가는 평화를 향해 전혀 눈에 띄진 않지만 애쓰는 많은 발걸음들이야말로 개인에게도 여러 민족들에게도 전장에서의 대승리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까?” <백장미는 지지 않는다>의 한 구절이다. 정말, 도대체 언제?

번역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