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시즈오카현과 야마나시현 경계에 있는 휴화산인 후지산은 해발 3776m로 일본 최고봉이다. 해발 3015m의 다테야마산과 2702m의 하쿠산과 함께 일본 3대 영산으로 꼽히며, 그 가운데서도 후지산은 ‘제1의 영산’으로 통한다. 이는 단지 높이 때문만은 아니다. 예부터 산 자체를 신으로 여길 만큼 후지산은 영험하고 상서로운 기운이 넘쳤다. 산에서 수행하며 진리를 깨치는 일본의 산악신앙인 슈겐도(修験道)의 중심지다. 이러한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신앙의 대상이자 예술의 원천’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후지산 등반이 꿈인 이라면 한가지는 명심해야 한다. 후지산의 일반인 대상 공식 개방 기간이 매년 7월 초부터 9월 초까지란 사실이다. 고작 두달에 불과하다. 이 기간이 지나면 강풍을 비롯해 적설과 결빙, 낙석의 위험이 커지면서 등산로가 공식적으로 폐쇄된다. 등산객들의 쉼터이자 숙소 역할을 하는 산장도 문을 닫는다. 물론 설산 등반 경험이 있는 숙련된 전문 산악인들은 계절에 무관하게 후지산에 오른다.

내가 처음 후지산을 오른 때는 2016년 여름이다. 당시 가나가와현 북부에서 열린 산악 레이스에 출전한 뒤 이튿날 관광 삼아 후지산을 찾았다. 그리고 7년이 지난 2023년 여름, 두번째로 후지산에 올랐다. 두번 모두 야마나시현 쪽의 요시다 루트를 이용했다. 후지산에는 총 네개의 등산로가 있다. 북쪽~북동쪽의 요시다 루트, 동쪽의 스바시리 루트, 남동쪽의 고텐바 루트, 남쪽~남서쪽의 후지노미야 루트다. 각기 다른 방향에서 출발하지만 모두 하나의 정상으로 향한다.
시간이 흘러 세번째 후지산 등반의 기회가 올해 여름 선물처럼 찾아왔다. 그것도 단순한 등산객이 아닌 ‘후지산 산악 가이드’라는 역할로 말이다. 산에 대한 전문성과 책임감은 물론이고, 낯선 환경에서 사람들과 호흡할 수 있는 친화력과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처하는 순발력이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홀로 산을 오르고 달리는 시간을 좋아하고, 말보다 글로 산을 소개하는 일에 익숙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새로운 기회 앞에서 도전해보고 싶었다. 산을 통해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형태의 시간이 궁금했다.



이번 일로 무엇보다 산을 좋아하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출국 이틀 전, 후지산 참가자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방수 재킷, 보온 의류, 헤드램프 등 필수 장비를 준비하라고 안내했다. 참가자 20명은 1955년생(71살)부터 1995년생(31살)까지 다양했다. 이들은 처음 오르는 후지산에 대한 설렘과 두려움이 담긴 글을 내게 보내왔다. 그 글을 보는 순간 후지산을 이들이 무사히 오르기를 바라는 마음, 산에서 마주할 감동으로 이들의 인생이 더욱 풍요로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일렁였다. 15년 전, 첫 국외 산행인 네팔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준비하던 시간이 떠올랐다.
이번 여행은 후지산 등반에 특화된 2박3일 여정이다. 토요일 오전 일본으로 출국해 월요일 늦은 밤 귀국하는 일정이라 직장인도 부담 없이 다녀올 수 있는 여행이다. 일정을 꼼꼼히 짰다. 후지산 산세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둘레길을 가볍게 걸은 뒤, 그날 오후 본격적으로 산에 오를 계획이었다. 산장에서 하룻밤을 묵고 자정 무렵 다시 정상으로 향하는 일정이었다. 후지산 등반에 온전히 힘을 쏟기 위해 다른 관광지 탐방이나 쇼핑센터 방문 일정은 없앴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롯이 후지산에만 집중하는 여행이었다.
처음 방문한 시즈오카현의 인상은 이름처럼 맑고 고요했다. 요시다 루트로 후지산을 오를 때는 도쿄를 거쳐 들어갔는데, 이번에는 후지노미야 루트로 오르기에 시즈오카를 관문으로 삼았다. 날이 밝고 가장 먼저 찾은 곳은 후지산 남서쪽 기슭에 자리한 다누키호였다. 호수 둘레를 따라 약 3.3㎞를 걷고, 이노카시라 마을을 지나 진마(진바) 폭포까지 이어지는 약 7㎞의 트레킹 일정을 진행했다. 다누키호는 호수 수면 위에 비치는 후지산 풍경으로 유명한 곳이다. 아쉽게도 구름이 후지산을 감싸고 있어서 이름난 그 풍경을 감상할 순 없었지만, 후지산 마을 정취를 느낀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곧 가까이 다가가 만난다는 기대감이 커졌다. 후지산에 내린 비와 눈이 오랜 세월 화산층을 통과해 절벽 틈으로 떨어지는 시라이토 폭포를 감상한 뒤 오후 2시가 되자 버스를 타고 후지노미야 5합목으로 이동했다. 창밖에는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과연 이런 날씨에 입산해도 괜찮을지, 만에 하나 누구라도 고산병이나 저체온증에 걸리면 어떻게 대비해야 좋을지 인솔자로서 걱정이 앞섰다. 여러 경우의 수를 그렸다. 다행히 5합목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는 비가 그쳤다. 산행에 필요한 짐을 간소하게 챙겨 이윽고 산에 들어섰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무료로 개방하던 후지산은 이제 입산료 4천엔(한화 약 3만5천원)을 내야 오를 수 있다. 2024년 요시다 루트가 처음 2천엔의 의무 입산료를 도입한 데 이어 다른 루트도 점진적으로 입산료 제도를 적용했다. 조금은 부담스러운 비용인데다 오랜 세월 신앙의 대상이었던 영산을 돈 내고 올라야 한다는 점에 거부감이 들었으나, 한해 수백만명이 찾는 후지산을 보호하는 동시에 등산객 안전을 위한 환경을 조성하는 데 필요한 비용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었다.
후지산은 산행 시작점에서 정상까지를 10구간으로 나누고 ‘합목’(合目, ごうめ·고메)이라는 단위로 부른다. 합목의 유래에는 여러 설이 있지만, 예로부터 산을 오를 때 밝힌 등잔의 기름이 타는 시간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중 5합목이 특별하다. 1합목부터 5합목까지는 자동차와 버스가 올라갈 수 있는 구간이다. 정상까지 남은 나머지 5합목은 오롯이 사람의 두발로 올라야 한다. 그래서 5합목은 일상의 세계를 벗어나 신성한 산에 들어서는 경계로 여겨진다.



오후 3시30분, 5합목을 출발해 2㎞ 남짓한 산길을 천천히 걸어 오후 5시께 신7합목에 자리한 숙소 고라이코 산장에 도착했다. 산장은 등산객들로 가득했다. 난민촌처럼 번잡스러우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낭만이 풍성했다. 해발 2700m 산상에서 보내는 하룻밤이라니. 산장에서 준비된 소고기덮밥으로 저녁 식사를 했다. 식사 뒤엔 참가자들의 몸 상태를 살폈다. 미미하지만 두통과 구토 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어 휴식과 취침을 권했다. 저녁 8시, 소등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다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인기척에 잠에서 깬 시간은 밤 11시. 3시간 남짓 가수면 상태로 누워 있었다. 우리 팀을 포함해 한국에서 온 단체팀은 서너팀 정도인 듯했고, 일본 현지에서 온 팀과 혼자 산을 오르는 등산객도 눈에 띄었다. 일찌감치 산행 준비를 마친 사람들은 하나둘 순서대로 산장을 빠져나갔다. 우리 팀 최고령자인 1955년생 참가자는 안타깝게도 고산 증세가 심해져 결국 출발을 포기했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그가 품었을 첫사랑 같은 마음을 짐작하니 안타까웠다. 그가 다시 이곳에 올 수 있기를, 이곳을 넘어 정상에 설 수 있기를 기도했다.

후지산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나 역시 야간 등반은 처음이었다. 산행 장비를 꼼꼼히 점검한 뒤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내가 선두에 서고, 참가자들은 각자의 페이스에 맞춰 뒤를 이었다. 내 또래의 회사원, 방학을 맞아 여행에 나선 교사, 대학생, 60대 부부, 30대 커플, 그리고 일흔을 앞두고 홀로 길을 떠난 여성까지. 저마다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생애 처음 후지산을 오르려고 하고 있었다. 신7합목에서 정상까지의 거리는 3.5㎞ 남짓했으나 누적 상승고도가 1000m를 훌쩍 넘기에 만만하지 않았다. 부디 무리하지 않으면서 저마다의 속도와 호흡으로 후지산과 만나기를 거듭 당부했다.



워낙 천천히 오른 덕분에 합목 하나를 지날 때마다 거의 1시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우리는 산장을 지날 때마다 충분히 쉬었다. 물을 마시고 숨을 고르며 자신의 몸 상태를 차분히 점검했다. 밤하늘의 별은 눈부시게 빛났고,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노란 헤드램프로 산자락을 환하게 비추며 단 하나의 길을 길게 잇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쉬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만의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사람들이었다. 나 역시 조금 더 힘을 내고 싶었다. 나무 한그루 없이 화산재와 자갈만이 발밑을 구르는 어두운 허공 속을 걸으니 우주의 소행성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얼마나 올랐을까. 어디쯤 왔을까. 시간도 공간도 모두 지워지는 곳에서 한동안 생각도 말도 없이 걸었다. 그렇게 정상부에 가까워졌을 무렵, 지평선 너머로 희미한 여명이 번지고 있었다. 해가 뜨는 곳, 서둘러 분화구의 동쪽으로 이동했다. 발밑의 운해가 마치 하얀 융단 같았다.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길도 이렇게 꿈결처럼 평온할 수 있다면. 구름 사이로 드러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오늘의 태양을 두 눈으로 응시했다. 그리고 생애 처음 만나는 장면 앞에서 아직 이 세상에, 또 나에게 남아 있는 희망과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다.
장보영 ‘아무튼, 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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