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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사회일반

누가 대한민국을 ‘정의와 공정의 상설 전투장’으로 만들었나

등록 :2020-09-20 09:07수정 :2020-09-20 15:45

[토요판] 표창원의 여의도 프로파일링
17. 진영 논리와 게으른 정의

불법·비리 의혹받는 개인의 문제
‘진영 싸움’으로 전환시키는 정치
유전무죄, 전관예우, 제식구 감싸기
한국 사회 고질적 병폐의 뿌리 돼

위기에 몰리면 ‘종북’으로 몰았던
보수진영 지금 대가 치르고 있어
탄핵 소중한 자산인 지지층 동력
진영 방어에 소진하면 후회 남아
1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에서 교육·사회·문화 분야 대정부질문이 열리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1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에서 교육·사회·문화 분야 대정부질문이 열리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한국 정당이나 정치인 중에서 ‘나(우리)는 정의롭지 않다’ 혹은 ‘정의는 내(우리)가 추구하는 가치가 아니다’라고 주장한 예를 찾을 수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정의를 위해 정치를 하며 정의를 위해 싸우는 ‘정의의 전사’로 자신들을 내세운다. 그런 정치인들이 같은 사안에 대해 정반대의 주장을 하며 서로 자신들이 정의라고 부르짖는 것은 너무 흔하다. 심지어 비리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는 순간까지 ‘진실이 밝혀지고 정의가 구현될 것’이라고 큰소리치는 것이 정치인의 자격증인 것처럼 여겨진다.

실제로 이들이 범죄 전과를 별처럼 달고 나와 다시 당선되거나 고위 정무직에 임명되기도 한다. 최근에는 700만원 가까운 업무추진비를 사적으로 유용하고 허위로 증빙자료를 작성해서 업무상 횡령 혐의로 검찰에 송치된 마포구의회 서종수 의원이 “떳떳하다고는 내가 말 못 하지요”라면서도 “그러면 선출직에서는 국회의원들 포함해서 떳떳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라고 주장해 충격을 주었다. 하도 그런 모습을 자주 보니 우리 사회에는 ‘세상에 정의는 없다’, ‘강한 자가 주장하는 것이 정의’이고 ‘결과적으로 승리하는 것이 정의’라고 믿는 ‘정의 혐오’, ‘정의 불신’ 풍조마저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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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방식 따른 보수의 자충수

2012년 5월 아산정책연구원이 미국 하버드대학교 마이클 샌델 교수와 함께한 조사에서 우리 국민 73.8%는 우리 사회가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7년 뒤인 2019년 11월 발표된 한국사회학회의 조사 결과에서도 71.3%의 응답자가 ‘우리 사회는 공정하지 않다’고 응답했다. 물론 빈부 격차나 기회의 불공정 등 구조적인 원인 탓도 크지만, 불공정한 사회구조 역시 정치의 책임이며 정치인들이 선거 때마다 해소하겠다고 약속한 주제 아닌가. 무엇보다 정치인 스스로가 자신이나 자녀와 관련한 불공정, 특혜 시비에 휘말리고, 이를 서로 공격해온 것이 대한민국을 ‘정의와 공정의 상설 전투장’으로 만든 주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정의와 공정 문제에 봉착한 정치인이 자기 편을 동원하고 선동해 개인 문제를 ‘진영 싸움’으로 전환시키는 현상이다. 보수 진영에서 보자면, 전두환과 노태우라는 두 쿠데타 주범이자 내란음모 살인 및 권력형 뇌물 수수, 국가재산 착복 사범의 서로 다른 행보가 분수령이었던 듯하다.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재판 결과 부과된 추징금을 대부분 납부한 뒤 속죄의 시간을 보내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하 존칭 생략)은 어떠한 정치적 영향력도 없다. 하지만 뻔뻔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법원의 판결마저 무시하며 재산도 숨기고 아직 1천억원 가까운 추징금을 내지 않고 버티는 전두환은 자신을 정치적 희생양으로 포장하고 ‘종북 좌파의 음모설’을 퍼트리면서 ‘진영 싸움’을 전개해왔다.

이 두 사람을 보면서 많은 보수 정치인은 전두환 방식을 채택하기 시작했다. 노태우처럼 ‘순진하게’ 속죄하면 누구도 인정하거나 고마워하지 않으며, 명예회복이나 정치적 영향력도 전혀 생기지 않는 반면, 전두환처럼 끝까지 음모론을 주장하며 ‘진영 싸움’으로 프레임을 바꾸면 일부라도 지지와 추종이 뒤따르고 이익과 영향력이 생긴다는 ‘사회적 학습’이 이루어진 것이다. 전 대통령인 이명박, 박근혜와 그 추종자들이 벌이는 ‘투쟁’이 가까운 예다.

전두환 군사독재에 맞서 싸우면서 정치적 힘을 키우고 세를 형성한 진보 진영 역시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도 역사적 아이러니다. 물론 비리나 불공정 의혹을 받는 이들 중에는 정말 ‘억울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상대방의 지나친 공격으로 사안이 침소봉대된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명확하게 옥석을 가려 문제가 있으면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과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은 채 ‘우리 편’이면 무조건 감싸는 것은 문제다. 이렇게 되면 국민은 판단할 수가 없다. 더구나 더불어민주당이 야당이었던 시절 상대방의 의혹에 적용한 기준과 잣대를 국민은 기억한다. ‘진보나 보수나 다 똑같다’는 정치 불신이 퍼져 국민만 불행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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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진영 해치는 ‘진영 방패’

한국 정치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현상은, 정치인 개인에 대한 의혹이 ‘진영 싸움’으로 전환되면 거의 자동적으로 동료 정치인이나 우호적인 지식인, 지지자들이 지원 사격에 나서는 것이다. 언론 등을 통한 비판과 여론 형성 과정, 행정적 조사, 사법적 재판 등 공적인 ‘절차’의 정상적인 작동을 방해하거나 영향을 끼치려는 의도다. 열린 민주국가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행태다. 한국 정치가 적대적인 양 진영으로 나뉘어 있는 탓도 있지만 권력에 의해 왜곡된 행정과 사법 절차 운용, 정론직필을 포기하고 왜곡과 선동에 나섰던 언론의 비뚤어진 모습이 기억에 강하게 남아 있는 것도 한 원인이다. 쉽게 말해서 ‘가만히 있으면 당한다’, ‘우리만 순진하게 당할 순 없다’는 인식이 정치권 전반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잘 아는 정치인들은 인정하고 책임지는 것보다 억울함을 호소한다. ‘날 도와주지 않으면 다음엔 당신이 당할 수 있다’고 주장해 진영의 막강한 도움을 받는 것이 유리하다는 생각을 하기 쉽다. 잘못이 있는 경우엔 책임을 모면할 동아줄, 잘못이 없거나 경미한 경우에도 혹시 모를 억울함을 미연에 방지할 안전망이 되기에 외면하기 힘든 유혹이다. 정치권의 이러한 인식과 태도는 그대로 시민과 사회 전반에 확산된다. 어차피 공정하지 않은 절차, 목소리 큰 사람이나 돈과 배경을 이용하는 자에게 유리한 사회라는 인식이 퍼지게 된다. 유전무죄, 전관예우, 청탁 문화, 줄서기, 제 식구 감싸기 등 고질적인 한국 사회 병폐의 뿌리가 정치권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개인의 비리 의혹을 ‘진영 싸움’으로 전환해 ‘진영의 방패’ 뒤에 숨는 습관과 관행은 과연 정치인과 그 진영에 이익을 줄까? 개인 정치인, 해당 사건에 대해서는 진영 싸움으로 본질을 흐려서 수사나 재판을 방해하거나 여론에 영향을 끼쳐 이익을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영원히 세상 모두를 속일 수는 없다’는 말이 있듯 언젠가는 진실이 드러나고 그 대가는 해당 진영의 후배 정치인들이 치르게 된다. 과거 독재 권력과 재벌·언론의 일방적인 지지를 등에 업었던 보수 진영이 의혹이 제기되고 위기에 몰릴 때마다 상대를 ‘종북 좌파’로 몰면서 음모론을 제기하고 책임에서 벗어났던 대가를 지금의 보수 정당이 치르고 있지 않은가. 보수 진영이 다시 국민의 지지를 회복했던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 또다시 ‘진영 방패’ 뒤에 숨어서 음모론을 제기하고 본질을 호도하다가 지금까지 대가를 치르고 있다. 진보 정부와 여당에 대한 의혹과 문제 제기가 계속돼도 다수 국민에게 대안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공정’이라는 이 시대의 화두를 짊어지고 나갈 적임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보수 진영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진보 진영도 우리처럼 타락했고 불공정해’라고 소리 지르는 것밖에는 없다.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 역시 탄핵 이후 형성된 강한 지지층이라는 소중한 자산을 불공정·불법 의혹에 연루된 인사들에게 ‘진영 방패’를 제공하느라 소모해버린다면 향후 오랜 기간 후유증을 앓게 될 것이다. ‘보수 강세’의 기울어진 운동장이 겨우 형평을 잡아가는 이때, 많은 이들의 고통과 아픔의 대가로 얻은 신뢰 자산을 몇몇 인사를 지키기 위해 소모하면 어쩌면 오래도록 회복하지 못할 상처와 후회로 남을 수 있다.

야구경기 5회 말 0 대 0 상황에서 2루 도루를 하던 주자에게 아웃이 선언되었다. 주자는 자신이 세이프라고 굳게 믿으며 ‘비디오 판독’을 하자고 감독에게 강하게 요구했지만 판독 결과 아웃임이 확인되었다. 팀의 소중한 비디오 판독 요구권이 날아간 것이다. 9회 말 역전 기회, 홈 승부 상황에서 명백한 오심으로 보이는 상황이 만들어졌지만 이미 비디오 판독 요구권을 다 써버려 패배를 감수해야 한다. 유사한 상황이 정치권에서 자주 발생한다. 다만 그 양상은 훨씬 더 갈등적이어서 사회혼란을 야기한다.

비리 의혹을 받는 인사는 정말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의혹을 제기하는 자나 상대 정당에 대해 음모론을 제기하고 수사기관이나 법원에 대한 불신을 표출한다. 그러면 그를 믿는 동료 정치인들은 그를 지지하며 감싼다. 특히 ‘지킴이’ ‘호위 무사’ ‘수호 천사’ 역할을 맡는 이들은 의혹의 당사자보다 더 강한 확신의 어조로 상대방 공격에 나선다. 진영의 지지자들은 이에 동조하며 인터넷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전투를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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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정의’ 극복해야 정치가 산다

여기서 차분하게 돌아볼 문제가 있다. 야구 감독이 해당 선수 말만 믿고 비디오 판독권을 사용한다면 그는 ‘게으른’ 혹은 ‘무능한’ 책임자다. 주관적이고 감정적일 수밖에 없는 선수 당사자보다 자체 영상 판독 기술자나 코치진과 상의한 뒤 결정해야 정상이다. 그래야 그 결정의 결과에 대해 해당 선수 탓을 하지 않게 된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본인이 억울하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그 말을 그대로 믿고 지지하고 감싸며 ‘진영 방패’를 가동한다면 그 정치인들은 게으르거나 무능하다고 비판받아야 한다. 정의감에 불타는 지지자들은 자기 진영의 정치 지도자나 주요 정치인 혹은 ‘스피커’ 역할을 하는 오피니언 리더들이 ‘부당한 정치적 공격’ 혹은 ‘음모’라고 주장하면 이를 믿고 행동에 나선다. 프로 야구팀의 감독 코치진처럼 자체 검증 시스템을 통해 사실 확인 절차를 거쳐 확신에 도달했을 것이라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박근혜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에서 입증되었듯이 최고의 정보력과 전문인력을 보유한 정부와 집권 여당조차 엄밀한 검증 없이 ‘당사자 말만 믿고’ 진영 방패를 가동하는 경우가 있다.

대한민국 정치를 내로남불, 극단적인 정쟁의 늪에 깊게 빠지게 만든 ‘게으른 정의’를 먼저 버리고 극복한 정당과 정치인이 더 오래 지속될 것이며 궁극적인 승리를 거둘 것이다. 주요 정당과 정치인들이 낡은 ‘게으른 정의’에서 탈피할 때 비로소 한국 정치가 정상화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국가와 국민을 위해 경쟁하며 협력하고, 비리·부패·불공정 정치인과 행태를 적발해 제거하고, 토론과 협의로 법과 정책을 만들어 나가는 제대로 된 정치의 성과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표창원: 전직 국회의원이자 ‘범죄 프로파일러’인 표창원 박사가 의원으로서 보고 듣고 겪은 사실과 언론과 정부, 대중 등 정치 환경, 정치인 언행의 동기와 의도 등을 종합·분석해 독자들에게 보고한다. 한국 정치의 병리현상을 해부하고, 문제의 원인을 추적해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국민을 위한 국회와 정치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염원을 담았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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