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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 스트레스 등 정신적 피해 정도가 극심해져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정이 입증된다면, 생전에 우울증 치료를 안 받았어도 보험회사가 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피보험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우 보험금 지급 면책권이 있는 보험회사는 통상 피보험자가 생전에 우울증 치료를 받은 기록이 있어야 보험금을 지급해왔다.

대법원 1부(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지난 2018년 퇴근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ㄱ씨 가족들이 보험사 5곳을 상대로 낸 1억8900만원 규모의 보험금 지급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지난달 9일 사건을 창원지법으로 돌려보냈다고 4일 밝혔다. 대법원은 “원심이 보험계약 약관의 면책 예외사유 해석 등에 관한 법리를 오해해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못했다”며 파기환송 이유를 밝혔다.

보험회사가 수익자인 ㄱ씨 가족에게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은 이유는 ㄱ씨가 생전에 우울증 등 정신질환 진단이나 치료를 받은 기록이 없었기 때문이다. 보험계약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우’를 보험금 지급하지 않는 사유로 규정해뒀다. 그러나 이 계약에는 ‘피보험자가 심신상실 등으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자신을 해했을 경우’에는 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예외가 달렸다. 보험회사에서는 대체로 이런 경우를 판단할 때 판례에 따라 사망한 사람이 주요우울장애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러 자살하였다고 볼 만한 의학적 견해, 즉 피보험자가 생전에 우울증 등 정신질환을 진단받아 치료받은 기록이 있는지를 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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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사는 ㄱ씨가 생전에 이런 의료기록이 없었다며 보험금 지급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가족들은 “과중한 업무, 육아 문제, 가족에 대한 죄책감 등으로 인한 극도의 스트레스가 지속적으로 누적된 상태에서 자포자기에 이르러 순간적으로 정신적 공황상태를 일으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라며 “면책사유의 예외인 ‘심신상실 등으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자신을 해친 경우’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1심은 원고 승소, 2심은 원고 패소로 판단이 갈린 상황에서 대법원은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은 “사망한 사람이 생전에 주요우울장애 진단을 받았거나 관련된 치료를 받은 사정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사망한 사람의 나이와 성행, 그가 자살에 이를 때까지의 경위와 제반 정황, 사망한 사람이 남긴 말이나 기록, 주변인들의 진술 등 모든 자료를 토대로 사망한 사람의 정신적 심리상황 등에 대한 의학적 견해를 확인하는 등의 방법으로 사망한 사람의 주요우울장애 발병가능성 등을 비롯해 그가 주요우울장애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자살에 이른 것인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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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씨 사망 직후 경찰과 근로복지공단의 조사 기록을 보면, ㄱ씨는 평소 업무상 스트레스를 많이 호소한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ㄱ씨는 업무 가중으로 육아휴직을 여러번 미뤘고 사망 전날에도 육아휴직 신청을 철회한 것으로 조사됐다. 근로복지공단은 ㄱ씨가 사망 직전 피로나 활력의 상실, 집중력 감소, 식욕 감소 및 소화기 장애, 수면 장애 같은 증상이 나타났는데 그 사유가 업무 때문인 것으로 판단했다. 이어 업무 과중으로 정상적 판단 능력이 저하된 상태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보고 ㄱ씨의 사망을 업무상 재해로 판단했다.

대법원은 “ㄱ씨가 우울증 치료 전력 없어도, 자살에 이를 무렵 극심한 업무 스트레스를 호소했고 주요우울장애 증상과 유사한 증상이 나타나기도 했다”며 “자살에 이를 무렵 주요우울장애를 겪고 있었고 이로 인해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사망에 이르게 됐을 여지가 없지 않다”면서 원심 법원이 심리를 다시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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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관계자는 “그동안은 사망자가 정신과 진료를 받지 않은 경우 보험금 청구가 기각되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번 판결은 사망자가 비록 생전에 정신과 진료를 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심리적 부검 등을 통해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는지 여부를 심리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연서 기자 loveletter@hani.co.kr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으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 자살예방 핫라인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청소년 모바일 상담 ‘다 들어줄 개’ 어플, 카카오톡 등에서 24시간 전문가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