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현 | 논설위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협박이 도를 더하고 있다. 대미 투자패키지 3500억달러(약 491조원)를 “선불”로 내라는 요구까지 나왔다. 한국 경제를 망가뜨릴 수준의 어마어마한 자금을 현찰로 바치라니 기가 찰 노릇이다. 자신의 힘과 성과를 강성 지지층에 과시하려 한 말일 수 있으나 그로 인해 환율까지 치솟았다.
우리 정부는 3500억달러를 대부분 대출·보증으로 제공하겠다고 했으나 미국은 막무가내다. 현금으로 내야 하는 지분투자 방식을 고집하고 있다. 뉴욕의 부동산 시장과 월가에서 잔뼈가 굵은 트럼프와 그의 분신들(재무장관과 상무장관)이 이런 규모의 자금이 한국 같은 나라에서 단기간에 빠져나가면 외환시장이 대혼란에 빠질 것이라는 점을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고집을 부리는 건 미국은 단 한푼도 손해 보지 않겠다는 속셈이 깔려 있다. 지분투자는 결국 투자자 책임이니 사업 실패 시 손실은 대부분 한국이 떠안아야 한다. 게다가 투자 결정권도 트럼프가 갖고, 이익 배분은 미국 9 대 한국 1이란다. ‘이익은 미국, 손실은 한국’이라는 셈법은 날강도 같은 짓이다.
트럼프는 미국이 80년간 유지해온 국제무역체제를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관세를 상대국 압박의 무기로 사용했던 2차 세계대전 이전 시대로의 회귀다. 그렇다고 그럴듯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건 오직 ‘트럼프 맘대로’다. ‘트럼프 황제’의 변덕에 따라 관세가 달라지니 전세계가 혼돈에 빠질 수밖에 없다. 적과 동맹국 구분도 없다. 되레 적보다 동맹국에 더 가혹하다. 트럼프는 중국이 희토류 수출통제로 맞서자 뒤로 물러서며 중국에 대해선 두차례나 관세 유예 조처를 해줬다. 반면에 한국처럼 만만해 보이는 나라한테서 더 많은 걸 강탈하려 한다.
트럼프가 내세우는 무역적자 축소와 제조업 일자리 창출이라는 목표는 우격다짐과 강압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고 오히려 역효과를 낼 게 뻔하다. 트럼프는 관세를 만능키처럼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무역적자는 기본적으로 미국인들이 생산하는 것보다 더 많이 소비할 때 발생한다. 미국 정부의 지출 감축과 미국인들의 과소비 성향을 고치고, 미국산 상품의 경쟁력을 높여야 비로소 무역적자를 줄일 수 있다. 관세 부과로 제조업을 부흥시켜 일자리를 늘릴 수 있다는 공약도 거짓말에 가깝다. 예컨대, 트럼프 1기 때 철강 관세 부과로 철강산업 일자리는 1천개 늘었지만 철강을 원자재로 쓰는 자동차·기계 등 연관 산업에서는 7만5천개나 줄었다. 갑자기 생산비 부담이 커져 경쟁력이 떨어진 탓이다. 제조업 일자리 문제는 저가 수입품 탓보다는 자동화와 산업구조 전환 영향이 훨씬 크다. 이렇듯 트럼프는 주로 국내적 요인으로 발생하는 문제들을 마치 관세로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한다. 포퓰리스트의 혹세무민이다. 강성 지지층에 기대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 가짜 약을 팔고 있는 것이다.
국가 경제와 안보에 긴요한 산업의 부흥은 지도자라면 당연히 추구해야 할 사안이다. 다만 그 목표를 이루려면 무분별한 보호관세가 아니라 인프라 투자, 기술 개발, 인력 양성, 산업 생태계 조성 등의 전략적 산업정책을 중장기적 시계를 갖고 추진해야 한다. 또 중국과의 경쟁에서 이기려면 유럽과 한국·일본, 일부 자원 대국과 공조해 대응하는 게 현명하다. 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이 추진했던 게 바로 이 전략이었는데 트럼프가 이 모든 걸 해체해버렸다. 패권 경쟁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트럼프의 행보는 동맹국의 이탈을 불러와 중국에 유리한 국면을 조성할 것이다. 트럼프 정책은 모순덩어리로 가득 차 있어 1~2년, 늦어도 3년 안에 파열음을 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제아무리 미국이라 해도 국제무역과 경제학의 기본 법칙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미국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다시 바이든 전략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투자금의 원금 보전도 가늠키 어려운 이런 상황에서 천문학적 규모의 국민 세금을 트럼프에게 내줄 수는 없다. 우리로선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투자를 하되, 그걸 넘어서는 요구엔 버티며 중장기전에 대비해야 한다.
해방 직후 격동기에 “미국놈 믿지 말고 소련놈에 속지 마라. 일본놈 일어나고 되(중국)놈 되(다시)나온다. 조선은 조심해라”는 민요가 유행했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해방정국을 겪으며 켜켜이 쌓인 강대국들에 대한 불신이 짙게 배어 있다. 80년 전 민중들의 경계심은 현재 상황에 대입해도 틀리지 않는다. 약소국의 운명 따위엔 아랑곳하지 않았던 강대국의 약탈적 속성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 대한민국은 ‘미들파워’(중견국)로서 카드로 내밀 만한 역량을 갖고 있는 만큼 우리의 입장을 치열하게 개진하고 관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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