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창원 |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 아세안센터 연구위원·전 동티모르국립대 한국학센터장
지난 26일, 동티모르(티모르-레스테)가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의 정회원국이 되었다. 인류의 집단 기억 속에서 배제되었던 역사를 복원하는 상징이자, 아세안이 단순한 경제 블록을 넘어 ‘연대의 공동체’로서의 이상을 실천한 사건이다. 식민과 침략, 학살, 빈곤을 견뎌낸 ‘눈물의 섬’ 동티모르의 서사가 이제 지역 질서의 설계 과정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동티모르 독립의 결정적 시기는 1999년이었다. 인도네시아군과 친인도네시아 민병대에 의한 대량 학살이 자행되던 위기 상황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뉴질랜드 아펙(APEC) 정상회담에서 미국, 일본과 함께 인도네시아의 무력 진압 중단을 강력히 요구하는 외교적 압박을 주도했다. 이처럼 구체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국제사회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유엔 안보리는 만장일치로 다국적군(INTERFET) 창설을 승인하는 내용의 결의(1264호)를 내렸고, 동티모르에 다국적군을 파병했다.
2002년 독립을 회복한 동티모르는 2006년 위기 사태를 극복한 후에도 민주주의적 전통을 키워, 현재 동남아시아에서 최상위 수준의 민주주의를 구축했다. 올해 프리덤하우스 평가에서도 동티모르는 100점 만점에 72점을 받아 동남아 국가 유일의 자유 등급을 받았다.
이번 아세안 가입은 무엇보다 ‘경계의 해체’를 상징한다. 16세기부터 식민 지배를 받으며 정체성을 억압받던 동티모르인들은 독립 후 포르투갈어와 토착어 테툼어를 병용하며 독특한 언어 공동체를 재건했다. 아세안 가입은 이 문화적 주체성의 제도적 복원을 의미한다.
특히 한때 동티모르를 강제 병합했던 인도네시아가 꾸준히 가입을 적극 지지했다는 점은 동남아 근현대사의 위대한 화해 드라마다. 국가 간 관계가 갈등의 기억을 넘어 협력과 연대를 통해 새로운 미래를 구축할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동시에 이는 경제력을 넘어선 가치의 승리이기도 하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아세안 최하위인 동티모르는 2011년 첫 가입 신청 이후 14년간 “다양한 격차”를 이유로 거부됐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석유·가스 기금을 통해 경제 발전과 기반 시설 구축을 추진했고, 지난해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통해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
아세안의 결단 이면에는 지정학적 계산도 작용했다. 미·중 갈등이 격화하면서 아세안 중심성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회원국 확대는 조직의 결속력과 협상력을 높이는 전략적 선택이었다. 공식적인 준비 과정을 거친 동티모르를 이 시점에 받아들인 데는 이러한 현실적 고려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동티모르 가입의 의미를 퇴색시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강대국 경쟁이라는 냉혹한 현실에서도 아세안이 국내총생산 수치보다 민주주의, 평화, 문화적 다양성을 저울질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동티모르 가입은 경제력만으로 국가 가치를 재단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관에 대한 성찰이며, 지정학적 이해와 규범적 가치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지역통합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다.
동티모르의 여정은 한국에게도 교훈을 준다. 1999년 9월28일, 한국 국회는 역사상 최초로 무장 보병부대를 평화유지군으로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유엔의 도움으로 한국전쟁을 치렀던 우리는 동티모르와 유엔의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 지금껏 한국은 고용허가제를 통해 약 7000명의 동티모르 노동자를 받아들였다. 동티모르 전체 인구의 0.5% 규모로, 동티모르인은 이미 우리 이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 소홀했다. 2015~2019년 임금 체불과 산업재해 문제가 발생했고, 2020년 동티모르 정부가 노동자 보호 강화를 요청한 사실은 ‘공여국’이라는 우월적 지위에 갇힌 일방적 프레임을 벗어나야 함을 보여준다. 이제 한국은 아세안의 구성원이 된 동티모르를 진정한 동반자로 인정해야 한다. 동티모르가 역내 가치사슬에 통합되도록 실질적 지원이 필요하다. 동티모르의 성공은 한국 외교가 얼마나 성숙했는지를 보여주는 잣대가 될 것이다.
동티모르의 아세안 가입은 한 국가의 성공담을 넘어선 치유와 회복의 서사다. 약자가 강자의 질서로 흡수된 것이 아니라, 약자의 경험과 고통의 기억이 지역 질서의 한 축으로 포함되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지정학적 현실이 작동하는 세계에서도, 진정한 지역통합은 경제력의 합산도 힘의 균형도 아닌 약자의 고통까지 포함하는 ‘기억의 균형’ 위에 세워져야 한다.
한국이 이 작은 나라의 도약을 어떻게 지지하느냐는 외교적 성숙도의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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