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0년대 초, 미국 뉴욕에서 일하던 심리학자 허버트 프로이덴버거는 하루에 두 번 출근했다. 개인 진료소에서 하루 10시간을 일한 다음, 저녁에는 세인트 마크 무료 진료소를 찾았다. 약물중독자와 노숙인을 돕기 위해 자원봉사를 한 것이다. 병원이 문을 닫은 뒤에도 프로이덴버거는 다른 자원봉사자들과 새벽까지 회의했다. 집에 돌아가 몇 시간만 눈을 붙인 뒤 다시 똑같은 일정을 반복했다. 이렇게 1년이 지나자, 프로이덴버거는 무너졌다. 어느 날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기도 힘들 정도로 몸 상태가 악화됐다. 1974년 학술 저널에 그가 발표한 논문의 제목은 바로 ‘직원 번아웃’이다.
프로이덴버거가 번아웃이라는 말을 처음 등장시킨 지 50년이 지났다. 이제 번아웃(소진증후군)은 전세계적으로 통용된다. 2019년 세계보건기구(WHO)는 제11차 국제질병분류기준(ICD-11)에서 번아웃을 직업 관련 증상의 하나로 기술했다. 질병으로 따로 분류하지는 않았지만,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 ‘직장 스트레스’가 건강 상태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재차 강조한 것이다.
휴식 시간도 없이 일만 바라보며 달리다가…
프로이덴버거는 논문에서 일에 대해 “헌신적인, 너무나 헌신적인” 사람들이 번아웃을 경험할 위험이 크다고 지적했다. 휴식 시간도 없이 너무 오래, 너무 열심히 일만 바라보며 달려오다가 번아웃의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번아웃을 측정하는 데 가장 많이 사용되는 보조 도구는 ‘말라크(매즐락) 소진 측정도구’(MBI, Maslach Burnout Inventory)다. 직업군별로 조금씩 다른 자가 측정 설문식으로 구성된 이 조사에 따르면, 번아웃을 겪는 이들은 공통적으로 △극도의 정서적, 신체적 피로감과 의욕 상실 △공감 능력 저하로 인한 냉소적 태도 △개인적인 업무 효율이나 성취감의 저하를 경험한다.
‘윤홍균정신건강의학과의원’ 윤홍균 원장은 저서 ‘마음 지구력’에서 “우리가 지쳤을 때는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편도체만 활성화된다. 긍정적인 감정은 느껴지지 않고 판단력도 둔화된다”며 “감정 기복, 자존감 저하, 세상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 불면이나 식욕 부진 등의 신체 기능 저하, 모든 게 불가능해 보이고 하기 싫은 양가감정 등의 증상은 모두 소진증후군의 대표 증상”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증상은 우울증에서도 흔히 보인다. 이 때문에 일부 전문가는 번아웃을 우울증의 한 형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2014년 렌조 비안키 노르웨이과학기술대학 교수가 이끄는 연구팀이 교사 5575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번아웃으로 분류된 개인의 90%가 우울증 진단 기준에 해당하는 것으로 나오기도 했다.
최근에는 번아웃을 겪을 때 자살 사고의 위험이 커진다는 연구 결과도 발표됐다. 지난해 강북삼성병원 기업정신건강연구소 오대종 교수, 정신건강의학과 전상원·조성준 교수 연구팀에 따르면, 번아웃 증상 중에서도 신체적·정서적 탈진이 있는 직장인들의 경우 △우울증이 있는 직장인에게서는 자살 사고 위험이 36% △우울증이 없는 직장인에게서도 자살 사고 위험이 77%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울증이 없는 사람이라도 번아웃을 경험하면 자살 사고 위험이 급증한다는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탈진 상태의 직장인 중에서도 특히 자기 직무를 스스로 조절할 수 없거나 직장 내 분위기가 우호적이지 않은 경우 자살 사고 위험이 더욱 큰 것으로 확인됐다.
위 연구는 2020년부터 2022년 사이, 직장인 마음 건강 증진 서비스를 이용한 제조, 금융, 서비스, 유통, 건설, 공공 행정 등 다양한 직종의 노동자 1만3천여 명을 대상으로 자가 설문을 통해 번아웃과 자살의 여부를 조사한 것이다.
조성준 교수는 “번아웃 증상과 우울증, 혹은 불안증은 상당히 복잡하게 얽혀 있다. 우울증으로 진단받은 환자가 아니더라도 번아웃만으로도 자살 사고의 위험이 높아진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번아웃이 있으면 우울과 불안 가능성도 커져 ‘죽고 싶다’는 생각을 더 자주 하게 되는 것이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번아웃 예방과 우울증 및 불안증 예방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다들 힘든데 내가 유난인가” 인식, 강박으로 작용
한국 사회는 번아웃에 매우 취약한 사회다. 경제적 성공이 삶의 주된 목표로 자리 잡은 한국에서는 개인의 성취가 곧 자신의 가치로 평가받는다. 올해 초, 미국의 여론조사 기관 퓨리서치센터가 17개 선진국 성인 1만9천 명을 대상으로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가치는 무엇인가’를 물어본 결과, 한국은 유일하게 물질적 풍요를 삶의 가장 큰 의미로 꼽았다. 이러한 분위기는 “쉬면 안 된다” “열심히 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강박으로 쉽게 이어질 수 있다. 많이 옅어지기는 했지만, 아직 남아 있는 집단주의적 문화 탓에 “다들 힘든데 내가 유난인가?”라는 인식을 가지는 사람도 많다.
번아웃 증상으로 3개월째 정신건강의학과를 정기적으로 방문하고 있는 전미진(가명·42)씨는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 처음으로 장기 휴가를 신청했다. 그는 삶에 대한 미련이 점차 없어지는 자신이 무서워져 병원을 찾았다. 미진씨는 “자랑 같지만, 직장 생활 시작하고 ‘일을 잘한다’는 평가를 많이 받았다. ‘에이스’로 불리는 게 정말 좋았다. 그래서 더 쉬지 않고 달렸던 것 같다. 한번 무너지고 나서야 스스로 계속 세뇌시켰다. 쉬어야 한다고. 그런데 막상 오래 쉬려고 휴가를 신청하고 나니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멈춰 있는데 모두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다시 파고들었다”고 털어놓았다.
조 교수는 “우리나라는 쉬는 걸 굉장히 죄악시하고, 휴식에는 전혀 가치를 두지 않는 사회였다. 대학 입시에서도 ‘4시간 자면 붙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는 식의, 쉼 없이 달리는 사람들이 전설로 미화됐다. 게다가 경쟁이 치열하고 비교하는 문화도 만연해 있다. 내가 어떻게 하면 행복한가보다는, 사회에서 말하는 성공을 이뤄야 행복해진다고 생각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지적했다.
더불어 한국 사회가 여전히 정신적 어려움을 인정하거나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큰 점도 문제라고 짚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이가 우울이나 불안을 스스로 자각하기 어렵고, 설령 자각하더라도 이를 외부에 드러내는 데 큰 부담을 느낀다. 강한 정신력만을 강요하다보면 자신의 고통뿐 아니라 타인의 정신적 고통조차 인정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
조 교수는 “이런 환경에서는 자신의 우울과 불안을 알아차리기 힘들다. 누구나 취약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필요하다. 번아웃이 오는 건 나약해서가 아니라 너무 열심히 일했기 때문일 수 있다. 더불어 번아웃에 취약한 상황에서 정신적 어려움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이 중요하다. 단순히 자살 예방에 국한된 캠페인을 넘어서 번아웃이나 스트레스 관리를 위한 교육과 대화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구체적으로 정부는 건강검진에 정신건강을 진단할 수 있는 항목을 추가하고, 기업에서도 일정 규모 이상의 사업장에 심리 전문가나 상담사를 배치하는 방안 등을 고려해볼 수 있다”고 짚었다.

윤은숙 기자 sug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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