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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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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위험한 행위로 야기될 수 있는 사고나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떠올릴 수 있는 방안은 위험한 행위 그 자체를 금지하는 것이다. 자동차 사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자동차 운행을 제한하는 식이다. 피해 방지에는 분명 도움이 되겠지만, 너무 급진적인 방안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은행의 위험과 관련해서는 이런 방안이 오히려 친숙하다. 은행의 고유한 위험은 뱅크런 가능성이다. 뱅크런 위험은 자산과 부채의 만기 불일치에서 비롯되는 터라 상존하는 위험이다. 이러한 위험을 통제하기 위한 대표적인 방안이 자본 규제와 유동성 규제다. 이런 규제는 만기변환에 대한 직접적 제한이라는 점에서 은행의 본질적 행위 그 자체를 억제하는 방안에 가깝다.

유동성 규제는 단기부채의 상환(예금인출 등)에 대비하여 일정 비율의 고유동성 단기자산을 보유토록 하거나, 자산의 만기구조를 염두에 두고 그에 대응하는 장기부채를 보유하도록 하는 규제다. 요컨대 자산과 부채의 만기를 어느 정도 일치시키라는 규제다. 자본 규제도 이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장기 자산에 대응하여 단기부채만 보유하지 말고, 만기가 아예 없는 자기자본을 일정수준 보유하라는 규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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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의 고유 위험이 만기변환에서 비롯되므로, 만기변환에 대한 직접적인 제한이 은행을 안전하게 만드는 것은 당연하다. 자동차를 적게 탈수록 자동차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작아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위험의 이전…그림자 은행의 탄생

그러나 한 발짝 떨어져 생각해보면, 위험한 행위에 대응하여 그 행위 자체를 직접적으로 억제하는 방안은 결과적으로 실효성이 크지 않을 수 있다. 자동차 사고 사례로 돌아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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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사람들이 취미 삼아 드라이빙을 즐기는 등의 이유로 사회적으로 필수적이지 않은 자동차 운행이 많다면, 자동차 운행시간 제한은 교통사고를 줄이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출퇴근 등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자동차 운행이 대부분이라면, 자동차 대신 다른 이동수단을 이용해야 한다. 자전거가 주요한 이동수단이 될 수 있고, 법적으로는 자동차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는 자동차와 매우 유사한 새로운 이동수단이 등장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자동차 운행시간 제한이 전체 교통사고의 위험을 낮춘다고 단언할 수 없다. 자전거를 타면서 신속한 이동을 위해 자동차와 동일한 속도로 주행한다면, 교통사고로 인한 피해는 오히려 커질 수 있고, 안전성이 충분히 입증되지 않은 새로운 이동수단의 등장이 위험을 증가시킬 수도 있어서다. 요컨대 자동차 사고 위험은 줄어도, 교통사고 위험은 커질 수 있다.

은행도 마찬가지다. 은행의 만기변환 행위가 사회적으로 필요한 수준을 크게 웃돈다면, 만기변환에 대한 직접적인 제한은 은행을 보다 안전하게 만드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은행 규제로 인해 사회적으로 필요한 만기변환 행위가 억제된다면, 법적으로는 은행이 아니지만 실질적으로는 은행과 유사한 만기변환 기능을 수행하는 금융기관이 등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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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은행이 바로 그것이다. 자동차 대신 이용되는 자전거 등의 이동수단이 자동차보다 안전하지 않은 것처럼, 은행 규제로 인해 등장한 그림자은행이 은행보다 안전하다고 하기 어렵다. 규제가 반드시 세상을 안전하게 만들지 않는다. 위의 사례들에서 규제는 위험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이전시킬 뿐이다. 자동차 운행시간 규제로 교통사고 위험은 자동차에서 자전거로 이전되며, 은행 규제로 인해 뱅크런 위험은 상업은행에서 그림자은행으로 이전된다.

규제가 위험을 없애지 못하고 다른 부문으로 이전시키게 되는 이유는 규제 대상이 ‘위험하지만 사회적으로 필요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동수단이 필요한데 자동차 운행을 규제하면 다른 이동수단을 이용하게 되며, 만기변환이 필요한데 은행의 만기변환 기능을 통제하면 그림자은행이 그 기능을 대신 수행하게 된다. 그래서 자동차사고는 줄더라도 전체 교통사고는 오히려 늘어날 수 있으며, 은행은 안전해지더라도 전체 금융시스템은 오히려 더 위험해질 수 있다. 이처럼 의도치 않은 부작용을 피하려면, ‘사회적으로 필요하지만 위험한’ 행위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다른 방안을 생각해봐야 한다.

위험 통제의 또 다른 방안

규제가 위험을 다른 부문으로 이전시키는 데 그친 것은, 위험을 막기 위해 위험한 행위 자체를 금지함에 따라 그 행위가 다른 부문으로 이전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또 다른 방안은 행위와 위험을 분리함으로써 그 행위를 보다 안전하게 만드는 방안이 될 수 있다. 즉 자동차의 이동수단 기능을 유지하면서도 교통사고의 위험을 낮추는 방안, 은행의 만기변환 기능을 유지하면서도 그 위험을 낮추는 방안이 필요하다.

자동차 운행을 그대로 허용하면서 교통사고 위험을 낮추는 방안은 제동장치 개선을 통해 사고 발생 확률을 낮추고, 사고 발생 시 피해가 최소화될 수 있도록 좌석벨트와 에어백 등의 안전장치를 설치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은행의 만기변환을 허용하면서도 그로 인한 뱅크런 위험을 낮추는 방안은 예금보험이라는 안전장치다. 예금보험은 은행예금에 대한 지급보증을 통해 예금자들의 ‘패닉’과 ‘런’ 가능성을 차단함으로써 만기변환 기능이 원활하게 수행될 수 있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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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방안이 은행의 만기변환 그 자체를 억제하는 방안인 반면, 이런 둘째 방안은 은행의 안전한 만기변환을 지원하는 방안이다. 이것이 규제와 예금보험의 차이다. 자산과 부채의 만기 불일치로부터 야기되는 유동성 위험에 대해, 유동성 규제는 만기 불일치의 축소를 요구하는 방안인 반면, 예금보험은 만기 불일치를 허용하되 안전장치를 추가하는 접근이다.

그런데 은행의 만기변환 기능은 바로 민간화폐를 창조하는 기능이다. 은행이 예금이라는 화폐를 ‘창조할’ 수 있는 이유는, 대출자산과 예금부채의 만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 자산과 부채의 만기가 일치한다면, 즉 고유동성 단기자산과 더불어 그에 대응하는 단기부채를 보유한다면, 이는 하나의 화폐를 다른 화폐로 전환하는 것일 뿐, 화폐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안전한 만기변환을 지원하는 예금보험은 민간화폐의 안정성을 지원하는 제도인 반면, 이와 반대로 만기변환을 제한하는 유동성규제는 은행의 화폐 창조를 억제하는 방안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제도화된 ‘유동성 규제방안’(LCR)을 ‘내로 뱅킹’의 완화된 형태로 볼 수 있음은 지난 글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유동성 규제라는 완화된 형태든 혹은 내로 뱅킹이라는 극단적 형태든 간에 민간은행의 화폐창조를 억제하고자 한다면, 다음 두 질문에 답해야 한다. 첫째, 그림자은행과 같은 유사은행의 출현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엘시알(LCR) 규제를 제도화하는 계기가 되었던 글로벌 금융위기의 본질이 그림자은행에서의 패닉이라는 점은 많이 지적돼 왔는데, 다수 연구에 따르면 그림자은행이 출현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은행에 대한 규제다.

역사적으로 다양한 규제들이 은행의 만기변환, 화폐창조를 억제한 탓으로 은행이 충분한 화폐를 생산하기 어려웠고, 그래서 그 기능을 대신 수행하는 그림자은행이 출현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는 20세기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은행업의 발전, 민간화폐의 진화 과정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림자은행의 역사다. 19세기 민간화폐의 지배적 형태는 민간은행들이 발행하는 은행권이었는데, 이에 대한 주요국의 규제는 민간화폐의 형태 변화로 귀결됐다. 1844년 영국의 은행법, 1863년 미국의 전국은행법은 민간은행권의 발행을 제한했고, 이로 인해 민간화폐의 주요한 형태는 은행권에서 요구불예금으로 전환되었다. 즉 요구불예금은 19세기의 그림자은행이었다.

역사적으로 다양한 은행 규제들은 민간화폐 창조 억제를 목표로 했지만 지속적으로 실패했다. 이를 두고 미국 예일대학의 개리 고튼 교수는 시장경제에서 만기변환을 통한 민간화폐의 생산은 불가피하며, 규제 당국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은행시스템의 위치(location of banking system), 즉 민간화폐가 생산되는 장소일 뿐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물론 지금까지 실패했다고 해서, 앞으로도 성공하지 못하리라고 확언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두 번째 질문이 나온다. 민간은행이 만기변환을 통해 화폐를 만들지 않는다면, 대신에 누가 어떻게 화폐를 만들 것인가라는 문제다. 역사적으로 등장한 답변들은 내로 뱅킹과 시카고 플랜, 주권화폐, 암호화폐 등이다. 이들의 문제의식을 소개하는 것이 이 연재의 첫째 주제였다면, 이들의 공통분모와 그 한계를 살펴보는 것이 마지막 주제다. 이는 은행의 만기변환, 화폐 창조 행위가 ‘위험하지만 사회적으로 필요한’ 이유에 대한 부연설명이기도 하다.

(위 내용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필자가 소속된 기관의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임일섭 예금보험공사 예금보험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