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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금령총에서 발굴된 금관. 2022년 12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열린 특별전 당시 모습이다. 노형석 기자
1924년 금령총에서 발굴된 금관. 2022년 12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열린 특별전 당시 모습이다. 노형석 기자

신라의 천년 도읍이었던 경북 경주는 한국 고대 문화유산의 가장 큰 요람과도 같다. 도시의 터는 한반도 동남쪽 구석에 자리하지만, 기원전 진한 사로국 시대부터 기원후 고신라와 통일신라에 이르기까지 경주의 신라인들은 바깥의 문화와 문물에 대해 시종일관 열린 시각과 유연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대륙과 바다를 거쳐 오는 외래 문화를 발 빠르게 받아들이고 삭여 신라 특유의 풍격과 색깔을 만들어냈다.

‘신라’라는 나라 이름 자체가 날마다 새로워지고 사방을 아우른다는 뜻의 ‘덕업일신 망라사방’(德業日新 網羅四方)을 축약했다는 사실에서도 짐작되듯 당대 문화적 혁신과 세계화를 이끌었고, 오늘날 케이(K)컬처로 일컬어지는 글로벌 한류 문화의 초석을 놓은 이들이 신라 선조들이었다. 우리 것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세계의 다양한 요소를 받아들여 융합·승화한 케이팝, 케이콘텐츠 등이 세계적인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데는 이런 경주의 문화·역사적 디엔에이(DNA)도 녹아들어 있는 셈이다.

특히 최근 글로벌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 덕에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세계인들의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상황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연간 관람객 수가 지난 15일 역대 최대인 500만명을 넘어선 데도 늘어난 외국인 관람객들이 한몫했다. 이런 가운데 한국 문화의 상징성을 지닌 경주에서 올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열리는 것은 또 하나의 기회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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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이번 정상회의에서 여는 문화 행사의 초점을 우리 전통문화에 맞췄다. 참가하는 각국 정상과 관계자들에게 한국의 빼어난 전통문화를 전파함으로써 확고한 문화 강국으로의 또 한번의 도약을 노리는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 관계자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가 외교 중심의 행사이지만, 케이컬처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는 계기로 활용하려 한다”며 “이를 위해 경주라는 곳의 역사와 상징성을 앞세운 각종 전시와 전통문화 공연의 한판 난장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경주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금관 전시다. 국립경주박물관은 신라 황금문화를 상징하는 경주 고분출토 금관 6점을 104년 만에 처음 한자리에 모아 전시한다. 오는 28일부터 12월14일까지 ‘신라 금관, 권력과 위신’이란 제목으로 열리는 특별전이다. 1921년 세상에 신라 금관의 존재를 처음 알린 금관총 출토품을 필두로 금령총(1924), 서봉총(1926), 교동고분(1972), 천마총(1973), 황남대총 북분(1974)에서 출토된 금관들을 각각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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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보문관광단지 인근 솔거미술관에서는 ‘신라한향’(新羅韓香) 특별전을 오는 22일부터 내년 4월26일까지 연다. ‘경주에서 세계로: 전통과 현대의 조화, 미래를 열다’를 부제로 붙인 이 전시는 이번 정상회의 의제인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 땅 전통 미학과 접맥시킨 중견·소장 작가 4명의 개성적 시각예술 언어로 풀어낸다. 경주에 살면서 작업 중인 한국화 대가 박대성 작가는 울산 반구대암각화와 고구려 벽화, 신라 천마도, 훈민정음, 하회탈 등 문화유산이 한라산, 백두산, 금강산 등의 장대한 산수풍경과 어우러진 대작 ‘코리아 판타지’를 내걸었다. 송천 스님은 신라의 명피리 ‘만파식적’을 스테인리스 조형물로, 박선민 작가는 옛적 신라의 보탑을 푸른빛 감도는 유리탑으로 재현했다.

보문단지 안 우양미술관은 미디어아트 거장 백남준(1932~2006)의 1990년대 알짜 작품들 위주로 구성한 ‘백남준 특별전: 회로 속의 인간(Humanity in the Circuits)’(11월30일까지)을 펼친다. 기술과 예술, 인간의 관계를 평생 탐구한 백남준의 생각이 이번 정상회의의 비전으로 제시된 ‘포용적이고 지속가능한 미래’의 의미와 서로 연결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미디어아트 명작들로 꾸렸다는 게 미술관 쪽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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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 우양미술관의 백남준 특별전 현장. 정면의 자동차 설치 작품 ‘전자초고속도로 1929 포드’ 안쪽 너머로 고딕풍의 장식을 한 비디오아트 설치물 ‘나의 파우스트’ 연작들이 놓여 있다. 우양미술관 제공
경북 경주 우양미술관의 백남준 특별전 현장. 정면의 자동차 설치 작품 ‘전자초고속도로 1929 포드’ 안쪽 너머로 고딕풍의 장식을 한 비디오아트 설치물 ‘나의 파우스트’ 연작들이 놓여 있다. 우양미술관 제공

정상회의 기간 동안 경주는 거대한 공연장으로도 변모한다. 도시 곳곳에서 판소리와 전통무용 등 춤과 음악이 어우러진 다채로운 무대를 만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오는 31일부터 11월4일까지 경주엑스포대공원 문화센터 문무홀에서 선보이는 전통연희극 ‘단심’이 단연 눈길을 끈다. 개관 30돌을 맞은 국립정동극장이 ‘심청전’을 새롭게 해석해 한국무용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오는 27일엔 첨성대 특설무대에서 서울국제무용콩쿠르 특별공연을 선보인다. ‘연경당 진작례 복원 공연’은 첨성대 주변 고택을 무대로 조선의 궁중 잔치를 재연하는 야외 공연이다. 29일 월정교 수상 특설무대에선 ‘미래형 한복 퍼포먼스’가 펼쳐진다.

보문단지에선 기술과 예술을 결합한 미디어아트쇼가 볼만하다. 지난 17일부터 11월2일까지 호반광장에서는 수상 스크린과 레이저, 수백대의 드론까지 동원한 융복합 공연이 펼쳐진다. 오는 24일부터 11월16일까지 대릉원 일대에서 열리는 ‘대릉원 국가유산 미디어아트’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고분과 숲, 그림자와 영상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이채로운 풍광을 만날 수 있다.

노형석 nuge@hani.co.kr, 임석규 기자 sk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