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계에서도 '인문학의 위기'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영화는 소설을 모티브로 제작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다. 영상이 문자를 압도하는 시대가 아니라, 문자 없이는 존재하기 힘든 영상시대가 된것이다. “해리포터”, “향수”, “반지의 제왕”, “다빈치 코드”, “냉정과 열정사이“ 등등 사실, 굳이 열거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우리가 극장에서 보는 대부분의 영화가 소설을 기초로 한 작품들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영화계의 매너리즘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는 소재의 빈곤이라는 배고픔을 해소하기 위해 열심히 책을 뒤져, 마침내 허기를 채웠지만, 정작 문학계는 간이고 쓸개고 다 뺏기고, 가죽만 남아 쓰러질 지경이다.
소설이 영화화 되는 현상을 주의 깊게 살펴보자. 그리고 이 현상이 영화계에선 불가피한 일이라면, 소설로 대변되는 문학계는 이러한 현상을 토대로 ‘어떻게 하면 영화가 아닌 문학으로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과 성찰의 계기로 삼았으면 해서 이 글을 적는다.
우선 인문학의 위기론이 거듭 대두되고 있는 이유에서, 이러한 위기상황에 대처하는 문학계의 자세는 어떠해야할까라는 문제부터 생각해보자. 여기서 갈등의 핵심은 ‘돈’ 이냐 ‘예술’ 이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진정한 예술문학으로서의 길을 추구하느냐 아니면, 다양한 욕구를 만족시켜주고, 흥미위주의 창작활동을 하느냐는 오로지 작가와 출판사의 몫일 것이다.
또한 그들의 가치관에 따라 창작의 방향이 달라질 뿐이고, 그에 따른 판단은 독자가 하는 것이다. 다만 조금 우려되는 점이 있다면, 문학계에서 일명 ‘황색 소설’이 난무하지 않을까하는 점이다. 문학계에 주류와 비주류가 있다면 그중에 주류의 대부분을 ‘황색 소설’, 그중에서도 B급 이하의 저질 소설들이 차지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예로써 영화를 들 수가 있다. (영화와 소설은 표현방법과 그 형식만 다를 뿐 근본적으로 비슷한 대중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영화를 예로 들었다.) 예컨대, 몇 년 전부터 한국극장가엔 조폭영화가 난립했다. 아마 그 시작은 ‘친구’와 ‘조폭마누라’ 였지 않나 생각된다. 두 영화가 성공을 거두니 그 동안 소재의 빈곤으로 극심한 매너리즘에 빠졌던 영화계는 사막의 오아시스를 만나듯 기뻐했다. 그리하여,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해 총 제작되는 한국영화의 30%를 조폭영화가 차지하게 되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생뚱 맞는 자료일지는 모르겠으나, 2006년과 2007년 대비 실제 조폭의 수가 10%나 증가 했다고 한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했다고 해서 물에 ‘독’이 든 지도 모르고, 급하게 마구 마시면 곤란하다. 조폭영화와 조폭생산이 무슨 특별한 연관이 있겠냐 하겠지만, 분명히 상관관계는 있다. 그리고, 영화는 사회에 반향을 일으킬 만한 충분한 영향력을 갖춘 매체라고 확신한다.
소설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선택받는 매체 일수록 ‘독’에 빠지기 쉽고 소설의 경우는 독자의 자유로운 상상에 맡기는 측면이 더욱 강하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심각해 질 수 있다. 이는 사회적으로도 안 좋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예술문학으로서 창작활동에 매진하는 작가들에게는 치명적인 일이 될 것이다. 이런 우려의 배경에는 아무래도 신자유주의의 상징인 거대 자본의 유입이 있다. 최근, 영화 ‘디-워’가 300억원을 제작투자해서 논란이 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영화라는 것은 현대사회에 거대한 자본이나 다름없다. 영화가 소설에 관심을 보인다는 것이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한다면, 출판업계도 이런 소설의 영화화를 염두 하고 작품 활동을 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들도 어쩔 수 없이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생기는 불행은, 문학계 전반의 작품의 질 저하이다. 물론, 자유경쟁이 생기면 그 반대로 작품의 질이 향상되지 않냐는 의견도 있지만, 지금 영화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독립영화나 예술영화가 시장에서 성공하고 주목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문학계도 이러한 예술의 빈곤현상을 겪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일부에서는 이런 반응을 보인다. “인문학의 위기라고 스스로 비관할 때는 언제고, 영화와 소설이 공생하는 유일한 길을 ‘예술의 무덤’으로 매도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 아니요? 멍석 깔아주니 도망치는 꼴 같군요..” 영화와 소설이 공생하는 길이 될 수 있지만, 영화와 소설 둘 다 낭떠러지로 향하는 길이 될 수도 있다. 관점에 따라 틀린 것이고, 선 비판 후 대안모색의 태도를 취할 때, 좀더 효율적인 발전단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 무조건적인 비판도, 무조건적인 수용도 모두 옳지 않다. 그리고 이런 과도기에는 철저한 고민 뒤에야 ‘예술’과 ‘시장’ 두 가지를 모두 거머쥘 수 있는 대안이 나 올 수 있다.
그래서 부족하지만 한 가지 대안을 제시해 본다면, 과거 1920년대에서 40년대에 잠시 등장했었던 ‘영화소설’이라는 장르가 다시금 부활하는 것이다. ‘영화소설’ 은 대개 카메라와 관련된 전문적 용어의 사용만 없을 뿐, 내용을 영화 시나리오로 그대로 써도 될 만한 표현과 구성을 갖추고 있다. 다만, 지금은 소설자체가 별도의 장르로 구별되어 있지 않아서 ‘영화소설’이라는 장르를 추가 시키는 것이 특별한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장르 구분을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개별 장점을 살려보자는 의미다. 100미터 달리기에서 경쟁자들은 각 트랙을 구분 없이 마구잡이로 달리는 것보다. 자신의 정해진 트랙에서 앞만 보고 달리는 것이 더 빠른 기록을 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문학의 장르를 적당한 선에서 구별 짓는 것은 개별 장르가 동시에 발전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독자들의 다양한 욕구도 충족시켜 줄수 있는것은 물론이고 말이다.
계속해서 마치 문학의 대중 선호도가 영화의 그것과 비슷한 것처럼 이야기 했지만, 사실상 아직 문학은 영화만큼 대중의 열렬한 호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인문학의 위기’라고 했나? 사람들은 영상을 보는 것은 즐거워 하지만, 문자를 읽는 것에는 고개를 내젖는다. 단순히 사람들이 문자를 싫어하니까 소설도 안보겠지..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처사다. 사람들은 원래가 이야기를 좋아하고 서사를 좋아한다. 아무리 훌륭한 영화의 서사라고 해도, 따지고 보면 소설만큼 치밀하게 묘사되어 있지 못하다. 분명히 소설은 영화보다 인기가 적지만, 영화보다 장점이 많다. 그 장점이란, 지면의 충분한 여유, 자세한 묘사, 낭만적이고 시적 표현이 용이, 치밀한 줄거리의 구성, 무엇보다 독자의 상상에 맡기는 여운과 깊은 여백 등이 있다. 이 모든 장점은 소설만이 갖고 있는 강력한 무기이자 시장경쟁력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이 스스로의 장점을 잘 살리고 스스로 작품의 질을 높여나가는 동시에 시장에 눈을 돌린다면, 어느새 극장만큼 서점과 도서관을 찾는 대중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극장’과 ‘서점’이 똑같이 각광받지 않을까. 인문학의 위기란 없다. 다만 돌이켜 볼 수 있는 기회 일뿐.
문자란 우리가 숨쉬고 있는 공기와 같이, 사람과 영원히 함께 할 것이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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