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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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이름, 묘호

태종, 태조, 세종…. 후세에 알려진 이 이름은 왕이 숨진 뒤 올려진 ‘묘호’다. 이밖에도 왕에겐 아명, 원명, 자, 호 등 10여가지 이름이 붙었다. <왕의 이름, 묘호>의 지은이 임민혁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은 왜 하필 묘호에 주목할까? “당시의 유교윤리와 국가 이념, 통치철학 등 인간 사고를 통섭하는 가치판단으로 빚어낸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묘호 두 글자엔 국내, 국제 권력 간 투쟁의 역사도 함축돼 있다.

선조 26년, 임진왜란 중 왕은 신하들에게 명한다. 중국 황제의 전유물인 묘호를 쓰는 것에 대해 명나라가 꼬투리를 잡으면 뭐라 답해야 하겠냐는 거다. 다행히 외교분쟁으로 비화할 뻔했던 이름 논쟁은 명나라의 무관심으로 유야무야됐다. 조선이 사대의 예를 범하는 위험을 무릅쓰고도 묘호를 지킨 까닭은 뭘까? “조선은 독립적인 긍지를 갖고자 노력했고 중국에 대한 사대보다 국가와 사회질서, 왕실의 정통성 확립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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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2대 국왕인 공정왕은 ‘정종’이라는 묘호를 받는 데 300여년을 기다려야했다. 태조의 첫 계승자는 태종이 되기 마련인데 공정왕은 왕의 자리뿐 아니라 그 이름까지 동생 방원에게 빼앗겼다. “태조로부터 직접 왕통을 승계한 종통을 세우고자 했던 태종의 술수 때문”이다. 성종의 묘호를 결정하는 자리, 사림과 훈구 두 정치 세력이 링에 올랐다. 훈구 세력은 유교의 이상사회 주나라 성왕에 비유해 성종을 밀었고 사림파는 주희에 대한 흠모를 담아 인종을 주장했다. 결과는? 훈구파 승리. 사림은 이후 열세로 밀려났다. /문학동네·8800원.

김소민 기자 prettys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