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계 혁명가’ 한창기
‘잡지계 혁명가’ 한창기

〈특집! 한창기〉
강운구 외 58인 지음/창비·2만3000원

한창기.

시인 황지우씨는 선배 시인 김수영의 20주기 추도식에서 “씹어먹고 싶도록 그리운 사람이여!”라고 외쳤지만, 어떤 이들에겐 한창기(1936~1997)야말로 그렇게 외쳐 부르고 싶은 사람일 것임에 틀림없다. 인간 한창기에 대한 그런 목마른 그리움을 품은 사람들이 열한 해 전 세상을 뜬 그를 기리며 책을 펴냈다. 〈특집! 한창기〉에는 사진가 강운구씨를 비롯해 일로, 뜻으로 생전의 그와 인연을 맺었던 쉰아홉 사람의 글이 실렸다. 지난해 10월 휴머니스트 출판사에서 세 권으로 펴낸 그의 글 모음 〈배움나무의 생각〉 〈뿌리깊은 나무의 생각〉 〈샘이 깊은 물의 생각〉과 짝을 이루는 책이다. 그의 육필의 산물은 세 권의 책으로 모였고, 그와 더불어 한 시대를 보낸 사람들의 기억은 한 권의 책으로 묶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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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한창기는 어떤 사람이기에 그 많은 사람들이 글로써 그를 기리려 모여든 것일까. 가까이 사귀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하는데, 한창기가 바로 이 말의 진실됨을 증언하는 사람이다. 〈특집! 한창기〉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의 다채로움은 한창기 삶의 다채로움을 보여준다. 사진가·언론학자·편집자에서부터 디자이너·사업가·국어학자·화가·음악인·출판인까지 참 많은 직종의 사람들이 다 여기 모였다. 그는 “국어학자가 울고 가는” 재야 국어학자였고, 안목이 빼어난 문화재 수집가였고, 전통문화의 부활을 이끈 문화운동가였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뿌리깊은 나무〉와 〈샘이 깊은 물〉이라는 특별한 잡지의 편집인-발행인이었다. 한창기라는 이름에 따라붙는 수많은 별칭도 그가 이 잡지들을 창간하고 만든 사람이라는 사실과 깊이 관계돼 있다. 그의 모든 관심의 물줄기는 이 잡지들로 모여들었고, 이 잡지들을 거쳐 다시 뻗어나갔다. 그를 회상하고 추모하는 글들을 모은 〈특집! 한창기〉가 잡지 형식으로 편집된 것도 잡지 편집인으로서 그의 삶을 기억하려는 뜻의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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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한창기〉
〈특집! 한창기〉

말하자면 한창기는 그대로 〈뿌리깊은 나무〉였고 〈샘이깊은물〉이었다. 세상에 잡지는 많고도 많지만, 〈뿌리깊은 나무〉가 구현한 독보성과 독창성은 유례를 찾기 어렵다. 언론학자 강준만 교수는 〈뿌리깊은 나무〉의 특별함을 이렇게 묘사한다. “한국 잡지사는 〈뿌리깊은 나무〉 이전과 〈뿌리깊은 나무〉 이후로 구분된다.” 다른 언론학자 유재천 교수도 단언한다. “〈뿌리깊은 나무〉는 1970년대 정신사적 변혁운동의 주역이면서, 특히 문화사적 변혁운동의 주역이었다.”

한창기가 〈뿌리깊은 나무〉를 창간한 것은 박정희 유신정권의 패악이 극에 달했던 1976년이었다. 그는 그 거친 세상에 자태 고운 잡지를 내놓았다. 그것이 조용한 싸움의 시작이었다. 모든 것을 ‘외화벌이’로 귀결시킨 박정희 독재는 그 살벌한 체제의 보완물로서 ‘민족문화’와 ‘민족주체성’을 내세웠다. 그러나 거기에 진정한 민족도 문화도 주체도 없었다고 강준만 교수는 말한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군사작전식으로 추진된 ‘우리 것 사랑하기’는 실은 ‘우리 것’에 대한 모독이었다. 박정희식 히스테리만 계속되었더라면 ‘우리 것’은 오히려 경멸의 대상이 되었으리라.” 그 ‘박정희식’에 대항하여 참다운 ‘우리 것’을 제시한 사람이 한창기였다. “한창기의 ‘우리 것 사랑하기’는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박정희의 방식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강요할 힘도 없었지만, 그는 강요할 꿈조차 꾸지 않았다. 계몽도 아니었고 설교도 아니었다. 그는 세련된 포장과 알맹이로 ‘우리 것’의 값어치를 높여버리는 방식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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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대에 ‘우리 것’ 곧 전통의 생활과 문화는 ‘낡은 것’ ‘추한 것’ 취급을 받았다. 서구식 교양의 세례를 받은 사람일수록 그런 의식이 강했다. 그 자신 교양인이었던 한창기는 바로 이런 생각을 뒤엎었다. 그는 ‘우리 것’의 지극한 아름다움을 재발견한 놀라운 심미안의 소유자였다. 그는 아름다움을 꿰뚫어보는 눈으로 시대의 뒷길에 팽개쳐졌던 전통을 살려냈다. ‘뿌리깊은 나무’라는 제호가 벌써 그런 의식과 의지를 품고 있었다.

한창기는 독특한 의식과 의지는 잡지의 형식에서도 관철됐다. 〈뿌리깊은 나무〉 창간호는 잡지계의 오랜 금기를 모조리 깨뜨린 위반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그 위반은 머잖아 한국 잡지의 새로운 전범이 됐다. 〈뿌리깊은 나무〉 초대 편집장이었던 윤구병(변산공동체 대표)씨는 그 금기 위반을 열여섯 가지로 정리한다.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이 ‘한글 전용 가로쓰기’다. 〈뿌리깊은 나무〉는 권위 있는 교양지들이 고수했던 ‘국한자 혼용’과 ‘세로쓰기’를 모두 버렸다. 그 사실을 두고 어떤 이는 “19세기 말 서재필 박사가 순한글로 〈독립신문〉을 창간한 이래 가장 혁명적으로 한국 고유의 언론 매체를 창간하는 데 성공했다”고 평하기도 했다.


‘샘이 깊은물’
‘샘이 깊은물’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민족을 민중의 관점에서 보았다는 것이다. 민중을 발견한 사람이 한창기였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민족 문화를 민중의 눈으로 보고 민중의 삶으로 이해했다는 점에서는 그는 문화적 전위투사였다. 잡지의 민중적 관점은 문화·예술 분야뿐만 아니라 정치·사회 분야로까지 점차 퍼졌다. 1980년 광주를 짓밟고 권력을 틀어쥔 신군부가 그 불온함을 그냥 두지 않았다. 그해 8월호로 〈뿌리깊은 나무〉는 폐간당했다. 민중의 삶에 뿌리를 두고 우리 것의 가치를 키웠던 그 나무는 밑동이 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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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창기의 투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84년 전두환 정권의 위세가 한창이던 시절 〈샘이 깊은 물〉을 창간한 것이다. ‘여성용 가정잡지’로 등록됐지만 〈샘이 깊은 물〉은 〈뿌리깊은 나무〉의 정신을 올곧게 이은 또 하나의 〈뿌리깊은나무〉였다. 이 잡지에서도 한창기는 ‘당돌하고 발칙한’ 꼿꼿함을 한순간도 굽히지 않았다.

한창기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1남1녀’를 두었다고 말한다. 그 1남이 〈뿌리깊은 나무〉였다면 1녀는 〈샘이 깊은 물〉이었다. 두 잡지를 자식으로 둔 그는 자신의 정신을 온전히 그 자식들에게 쏟았다. 〈샘이 깊은 물〉이 태어난 지 13년 되던 1997년 그는 간암으로 세상을 등졌다. 그는 특별한 심미안으로 삶의 후미진 곳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창조한 사람이었다.

그의 11주기를 맞아 오는 2월1일 저녁 6시30분 서울 국립고궁박물관 뮤지엄카페 ‘고궁뜨락’에서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모여 추모식을 연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사진 ‘창비’ 제공.


한창기의 삶세일즈도 잡지도 ‘최고’를 추구한 심미안


 ‘뿌리깊은 나무’
‘뿌리깊은 나무’

한창기는 ‘우리 것’에 대한 한없는 사랑을 품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우리 것’ 전문가이기 이전에 그는 ‘서양 것’ 전문가였다. 그가 삶의 이력을 서양 것을 우리나라에 파는 사람으로 시작했다는 건 기이한 역설이다.

서울대 법대를 나온 한창기는 그 시절의 출세 코스인 법조인의 길을 거부하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한국지사 창립자가 되었다. 그는 우리나라 직판 세일즈맨 1세대였다. 그가 〈브리태니커〉 세일즈의 리더가 된 데는 영어 능통자였다는 사실도 한몫을 했다. 얼마나 영어를 유창하게 했던지 브리태니커 본사 부사장이 그를 만난 뒤 “동양 사람 중에서 한창기보다 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찬탄했다고 한다. 그가 나중에 우리말과 글에서 영어투, 일본어투를 없애고 민중의 입말을 말과 글의 바탕으로 만드는 일에 나섰던 것도 이런 명민한 언어감각 덕이었다고 한다.

1968년 한국브리태니커회사를 창립한 그는 유망한 젊은이들을 불러모아 ‘세일즈 전사’로 키웠다. 그는 본사에서 보내온 ‘브리태니커 사람들의 신조’를 한국 사정에 맞게 다듬어 매일 아침 조회 때마다 외우게 했다. “나는 적극적이다. 나는 부지런하다. 나는 합리적이다. 나는 끈기가 있다. 나는 목표가 있다. 나는 나의 능력을 믿는다.…” 종교의식과도 같은 그런 조회를 마친 세일즈맨들은 전국 팔도에서 뛰었다. 당시 고급 피아노 한 대 값이 넘었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한창기는 회사 창립 2년 만에 수하의 세일즈 일꾼을 250명으로 늘렸고, 전성기 때는 1500명을 거느렸다. 한창기의 회사는 ‘세일즈의 사관학교’로 알려졌다. 현대적인 세일즈 기법을 처음 도입한 회사였고, 마케팅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시도한 회사였다. “보험회사 중역들이 와서 어떻게 교육시키나 도강을 하기도 했고, 실제로 이력서를 내고 입사해서 판매사원 교육을 받는 사람도 있었다.” ‘브리태니커 신조’는 뒤에 여러 기업체에서 흉내내 회사 이름만 바꾸어 쓰기도 했다.

그에게서 ‘설득의 기법’을 배운 뒤 나중에 사업계로 진출한 사람이 여럿이다. 웅진그룹의 윤석금 회장도 한창기가 키운 ‘세일즈 영웅’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세일즈맨들에게 단순히 책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 교육사업 종사자이자 교육의 사절이라는 자부심을 불어넣어 주었다.” 윤 회장의 말이다.

그렇게 서양 것을 팔아 번 돈으로 그가 만든 것이 〈뿌리깊은 나무〉였다. 전성기 시절 〈뿌리깊은 나무〉의 정기구독자는 6만5000명을 헤아렸다. 당시 〈신동아〉의 정기구독자가 2만명이던 시절이었다. 세일즈에서 최고를 지향했던 사람답게 그는 잡지에서도 최고를 추구했다. 그가 추구한 최고는 그대로 그 시대 문화적 심미성의 최전선이었다.

고명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