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여성 이주노동자가 비닐하우스 안에서 딸기 꽃을 따며 열매 수를 조정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캄보디아 여성 이주노동자가 비닐하우스 안에서 딸기 꽃을 따며 열매 수를 조정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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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런 포니에는 ‘자기 이론’(2025)에서 자기 이론적 실천은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삶을 이해하려는 적극적인 시도인 만큼 언제나 ‘복수형’으로 존재한다고 선언한다. ‘나르시시즘적’이라는 가장 단순한 비판에 대해 자기 이론은 “자기에게서 출현할 수는 있어도 자기에 대한 이론”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다.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획기적인 이 선언을 고스란히 떠올리는 소설이 우리 곁에 당도했다. 김숨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 ‘딸기 이론’이다.

소설의 화자인 ‘나’는 미얀마에서 온 여성 이주노동자 샤빼다. 샤빼는 같은 딸기 농장에서 일하는 캄보디아 출신 이주 노동자 보파에게 편지를 쓴다. 소설은 ‘나’가 ‘너’에게 전하는 한통의 긴 편지로 이루어졌지만, 그 내용은 이주와 노동과 계급과 젠더와 언어와 폭력에 관한 진지한 탐구와 곡진한 질문들로 채워져 있다.

“나는 한 사람으로 왔어.” 소설의 문을 여는 첫 문장은 딸기 농장의 현실 속에서 지독한 역설이 되고 만다. 열악한 비닐하우스 숙소도, 고용주가 거머쥔 불평등한 권력 탓에 언제라도 ‘불법 체류자’가 될 수 있는 고용 조건도, 오로지 딸기의 상품성이 최우선시되는 현실에서 무방비 상태로 다양한 폭력에 노출된 이들의 몸도 ‘한 사람’의 조건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가장 큰 가치를 지닌 존재는 사람이 아니라 딸기다. 딸기는 이주 노동자가 고향에 송금할 수 있는 돈이 되고, 때로는 총알이 되어 국경을 넘나든다. 딸기 따는 손은 옆 동네에 깻잎 따는 손으로 대여되기도 하고(실제로 그런 ‘불법’ 거래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돼지와 닭과 함께 축사에 갇힌 손, 커다란 기계에 끼인 손, 뜨거운 쇳물을 뒤집어쓴 손들과 포개지며 끝내는 고향 미얀마 강가에서 생선을 손질하는 어머니의 손에 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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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이론 l 김숨 지음, 민음사(2026)
딸기 이론 l 김숨 지음, 민음사(2026)

“완나, 뚜라, 베트남 여자애들, 필리핀 여자애들. 우리 딸기 따는 여자애들 모두 모름다움에서 태어났어.” 고국에서 빚을 내 배운 한국어도, 한국 드라마에서 본 풍경도 딸기 따는 여자애에겐 아무 소용이 없다. 오히려 한국어를 몰라야 사장님이 좋아한다. 아는 데서 생겨난 ‘아름다움’이 통하지 않는 세계다. 그러나 이런 세계에서도 ‘나’와 ‘너’는 언어를 포기하지 않는다. 보파는 동료 노동자들과 전혀 대화를 나누지 않지만 매일 밤 식탁에 공책을 펼쳐놓고 일기를 쓴다.

‘나’는 그런 보파를 바라보며 ‘너’에게 편지를 쓴다. 그 과정에서 ‘보지 못한 데서 생겨난 보지 못하는 아름다움’을 뜻하는 ‘모름다움’이라는 말이 생겨난다. 아름다움의 세계에서 쫓겨난 ‘나’와 동료 노동자들은 ‘모름다움’의 세계로 넘어가며 비로소 주변 세계를 하나씩 이해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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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의 대상은 ‘나’에서 출발해 ‘너’로, 딸기 따는 여자애들인 ‘우리’로, 심지어 최초의 딸기 따는 여자애였던 딸기밭의 ‘사모님’까지 확장된다. 언어를 부정당한 ‘나’가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우리’에게 전하는 이 대목이야말로 미얀마 여성의 자기 진술로 시작한 ‘딸기 이론’이 어떻게 동료 여성 이주 노동자들을 경유해 한국의 독자들에게 닿는지 보여주는 자기 이론의 전범이다.

이주혜 소설가
이주혜 소설가

이주혜 소설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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