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년전 오늘 ‘용산폭격’ 잊혀진 비극
“그때 내가 학생이었어요. 벌써 60년이 흘렀지만 그 일은 지금도 잘 잊혀지질 않네요.”
지난 12일 오후 서울시립대 도서관에서 만난 손정목(82)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머릿속 깊은 곳에서 기억을 끌어내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60년 전인 1950년 6월25일. 갑작스럽게 터진 전쟁으로 서울은 대혼란에 빠져들었다. 서울은 전쟁 3일 만에 함락됐고, 당시 140만명에 이르던 서울시민 대부분은 한강 다리가 파괴되는 바람에 강 건너 피난은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발이 묶이고 말았다.
그때 고려대학교 법학과에 갓 편입한 22살의 손 교수가 있었다. 7월16일 신당동 친척집 비밀 지하실에 숨어서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을 읽고 있던 손 교수는 용기를 내어 대구대학(현 영남대학교) 시절부터 은사로 모시던 김삼수 교수(당시 고대 경제학과)의 용산구 후암동 집을 찾는다. 오후 2시. 김 교수의 집에서 점심 대접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지금의 안중근기념관(옛 조선신궁 자리) 부근 능선으로 올라서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요란한 폭격기의 굉음이 터지는 거야. 뒤를 돌아다보고 너무 무서워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지.” 북한군의 남하 속도를 늦추려고 당시 용산역(지금의 용산 민자역사) 뒤편에 있던 철도 조차장과 공작창을 부숴버리기 위해 출격한 미국 극동공군 폭격기사령부 산하의 B-29 중폭격기 50여대가 서울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공격 대상은 군사시설이었지만 오폭도 일어났다. 김태우 서울대규장각 연구교수는 “용산 폭격에 대한 미군의 작전명령서 등을 보면 당시 미 공군은 군사시설인 철도 조차장을 조준해 폭격을 한다고는 했지만, B-29의 오폭률이 높아 군사시설이 아닌 민가와 관공서, 학교 등도 큰 피해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용산 폭격의 피해는 어느 정도였을까. 1950년 말 공보처 통계국이 작성한 전쟁 초기 3개월 동안 서울시민의 사망·부상 현황을 보면, 전체 사망자 1만7127명 가운데 4분의 1이 공습으로 사망했다. 특히, 용산 폭격의 직접 피해 지역인 용산구는 전체 사망자 2709명 가운데 58.6%인 1587명이 피폭 사망자인 것으로 확인됐다.
지금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지만, 용산 폭격은 당시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상처를 남겼다. 김성칠 서울대 사학과 교수는 회고록에서 “용산과 살을 맞대고 있는 해방촌 사람들 수천명이 맹폭을 입고 무고하게 죽었다”고 적었고, 소설가 이범선은 작품 <오발탄>(1959년)을 통해 용산 폭격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이상자가 된 주인공 송철호 어머니의 비극을 고발했다.
김동춘 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상임위원은 “마을 공동체가 남아 있는 지방과 달리 서울은 인구 이동이 많아 이 폭격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부상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며 “우리가 이미 잊어버린 큰 비극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다. 한편, 이 사건의 유족 2명이 진실화해위에 진실규명을 신청했지만, 진실화해위는 지난달 말 ‘용산 폭격은 군사상 필요했던 작전’이라며 진실규명 불능 결정을 냈다.
길윤형 기자, 손준현 선임기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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