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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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학교(고등학교 과정) 학생인 준희(가명·16·사진)의 생물학적 성별은 여성이다. 중학교 때 생리를 시작했고 가슴도 봉긋하다. 그러나 준희는 스스로를 여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성 정체성에 대해 지각이 없었던 초등학교 때부터 ‘성당 언니’를 좋아했다. 중2 때부터는 선천적인 여성성을 가리기 위해 옷을 헐렁하게 입었다. 가슴이 나온 자신이 싫었다. 머리도 짧은 커트로 유지했다. 옷이나 가방은 검정 또는 회색이 대부분이다. 어른이 되면, 수염도 나고 키도 좀더 크도록 남성호르몬제 주사를 맞을 생각이다. 준희는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성 정체성은 남성에 가까운 트랜스젠더다.

지난 2월 준희는 고등학교 입학을 위한 추첨에서 여고에 배정됐다. 고등학생이 된 뒤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좀더 명확해지면서 고민은 더욱 커졌다. 매일 아침 거울에 비친 회색 교복 치마를 입은 자신이 낯설었다. 2학기가 시작되던 9월, 지금 다니는 대안학교로 옮겼다. 치마 교복을 입는 여고와 달리, 대안학교는 성별에 갇히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문제가 생겼다. 머리와 옷차림새를 남자처럼 하고 다니는 탓에 선생님으로부터 끊임없이 “너는 남자냐, 여자냐?”는 질문을 받는다. 남녀공학인데다 교복도 없는 학교라서 빚어진 일이다. 모든 학생이 ‘여성’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여고’에선 없던 질문이다.

초등때부터 ‘언니’를 좋아했고중학교부터 커트 머리를 했다여고 낯설어 대안학교 갔지만…선생님은 ‘남자냐, 여자냐?’ 묻고친구들 역시 편견을 갖고 있다엄마에게 말했지만 화만 낼 뿐…학교서도 집에서도 설 곳 없어나의 유일한 탈출구는 온라인성소수자들과 외로움 달랜다

아직 커밍아웃을 하지 않은 준희는 “여자요”라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여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여자’라고 답할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다. 그러나 우리나라 학교에서 성별은 여자와 남자 두개뿐이다. 그 견고한 이분법적 틀 속에 트랜스젠더 등 성 소수자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다. 전교생이 50명이 채 안 되는 작은 학교여서 속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 생각했지만, 친구들에게 성 정체성을 고백할 엄두는 못 내고 있다. 얼마 전 급식시간에 친구들의 대화를 들었다. “야, ○○랑 ○○랑 손잡고 다니더라. 걔네 레즈(레즈비언·여성이면서 여성을 사랑하는 동성애자)야?” “아, 더러워. 걔네랑 말 섞지 마.” 학교에서 후배들은 그에게 “언니, 밥 드세요.” “언니, 안녕하세요?” 등 ‘언니’라고 부른다. 그 호칭이 너무 불편해 준희는 말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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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선생님들이 하는 이야기도 불편한 말투성이다. 일본어 선생님은 “남고에서 예능 잘하는 애들은 성전환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했고, 국어 선생님은 “우리 아들이 분홍색을 좋아해서 걱정이야. 동성애자 기질이 보인다”며 걱정을 늘어놨다. 교과서에는 사랑과 결혼의 상대는 이성이라고 나와 있고, 약자인 여성에 대한 정책은 소개돼 있지만 성 소수자는 존재 자체가 언급돼 있지 않다. 곳곳에서 성전환자, 동성애자는 ‘비정상’ ‘괴물’이라는 생각에 부딪친다.

언제부터인가 준희가 말할 수 있는 공간은 온라인의 성 소수자 커뮤니티나 카페로 제한됐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레즈비언 커플에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성 소수자의 존재를 알게 되고 고민도 시작됐지만, 답을 주는 사람은 집에도 학교에도 없었다. 고민을 풀려면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 등 인터넷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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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이영식 중앙대 교수 등이 서울지역 1748명의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동성애 성향이 있다고 답한 학생은 12.7%에 이르렀다. 2006년 김경준 한국청소년개발원 연구위원 등의 연구에서도 자신을 성 소수자라고 응답한 청소년이 9.4%나 됐다. 그러나 이 10%에 가까운 존재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온라인 카페나 커뮤니티가 유일했다. 준희는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고민을 나누고 외로움을 달랬다. 지금까지 교제를 한 7명도 모두 그곳에서 만났다.

엄마에게는 털어놓은 적이 있다. 중2 때, “엄마, 난 여자가 좋은 것 같아”라고 진지하게 말했지만 엄마는 “네가 아직 어려서 그렇다”고만 했다. 그 뒤 외국에 사는 6살 많은 트랜스젠더와 사귀면서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그 편지를 보고서야 엄마는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애정 고백이 담긴 편지를 본 엄마는 모든 인터넷 활동을 중단시켰다. 그렇지만 성 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대화는 거부했다. 얼마 전 머리를 자르러 가서는 “그 지긋지긋한 커트 좀 그만하고 예쁜 머리를 할 수 없겠느냐”고 다그쳤다. 준희가 엄마의 의사와 상관없이 머리를 자르자, “너 혹시 남자가 되고 싶은 거니? 성전환 수술이라도 하겠다는 거니? 그렇게만 하면 넌 호적에서 없는 거다”라고 말했다. 준희의 말은 들어보려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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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희는 여성이 아닌데 여성이길 강요하는 집과 학교가 다 싫다. 얼마 전 제대한 ‘형’을 집에서는 ‘오빠’라고 불러야 한다. 그동안은 ‘김 일병’ ‘김 병장’ 등으로 불렀지만 제대한 지금은 달리 부를 말이 없다. 남동생은 준희를 ‘누나’라고 부른다. 지금 준희에게 유일한 안식은 ‘클릭질’뿐이다.

글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