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병철 |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출판인
장애의 역사는 폭력과 편견과 차별로 얼룩져 있다. 수렵채집시대부터 고대까지 장애인은 종종 방치되어 죽거나, 집단 구성원에게 살해당했다. 중세에는 장애를 신의 징벌로 간주해 멸시하거나 오락거리로 삼았다. 19세기 후반에야 장애를 공중보건 문제로 인식했으나 훈련을 통해 ‘쓸모 있는’ 존재로 만들거나, 그것이 불가능하면 시설에 격리하는 식으로 대처했다. 장애에 대한 여러가지 개념 모델이 제안된 것은 20세기 들어서의 일이다.
장애라 하면 대개 시각장애인이나 휠체어를 떠올린다. 이처럼 장애를 개인 내부에 존재하는 신체적 손상이나 기능적 제한으로 정의하고, 예방하거나 치료를 통해 개선해야 한다고 보는 시각을 ‘의료적 모델’이라고 한다. 우생학의 역사에서 보듯 장애란 비정상적 결함이나 결핍이며 없으면 좋다는 생각은 선의에서 출발했더라도 장애인 자체를 없애려는 인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발짝 나아간 것이 ‘기능적 모델’이다. 인지적 손상이나 신체적 결함 자체가 아니라, 그로 인해 이동이나 업무, 운동, 독립생활 등 중요한 활동을 수행할 수 없는 상태를 장애로 정의한다. 따라서 제 기능을 하도록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주력한다. 여전히 사람을 기능 유무로 나누며, 기능에 문제가 없어야 한다는 암묵적 결론으로 이어진다.
장애의 ‘사회적 모델’은 개인 내부 요인보다 외부 환경 때문에 활동이 제약된다고 본다. 휠체어를 탄다고 해도 모든 시설과 건물에 엘리베이터와 경사로가 있다면 활동 제약이 크게 줄어들 것이다. 똑같은 상해를 입었어도 경제적 여유가 있고 주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장애 부담과 향후 건강은 크게 다를 것이다. 이런 관점이 건설적인 이유는 개인을 정상-비정상으로 나누지 않고 있는 그대로 존중하며, 누구나 충만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다 같이 노력해야 한다는 철학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2006년 채택된 유엔 장애인권리협약(CRPD)은 장애의 사회적 모델을 기초로 했다.
지난 23일 ‘장애인권리보장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장애인 당사자인 여야 의원들이 당파를 초월해 협력한 결과다. 무엇보다 장애를 “사회의 문화적·물리적·제도적 장벽 등의 환경적 요인과 신체적·정신적 특성 등 개인적 요인 간의 상호작용으로 인하여 일상생활 또는 사회참여에 제약이 있는 상태”로 정의한 것이 눈에 띈다. 장애의 사회적 모델을 받아들인 것이다. 사회의 장벽을 없애 장애를 야기하는 요인을 줄이고, 장애인이 경험하는 다양한 불평등을 완화하겠다는 입법 의지가 읽힌다.
또한 이 법은 존엄권, 평등권, 자기결정권, 정책결정 참여권, 이동·접근권 등 핵심 권리를 일일이 명시해 장애인이 복지의 수혜자가 아니라 권리의 주체임을 밝혔다. 2년 후 법이 발효되면 교육, 노동, 건강, 소득보장, 문화·예술·체육과 사법 접근성 등 장애인의 일상 전반을 보장한다. 장애아동, 장애노인, 장애여성에 관한 규정도 별도로 마련해 각기 다른 처지에 있는 장애인을 맞춤 지원할 길도 열었다.
탈시설 권리도 명시했다. 문구가 다소 완화되었는데 섣부른 탈시설은 자칫 방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 등 첨예한 쟁점들이 아직 정리되지 않은 만큼, 불가피한 면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초로 법제화되었다는 의미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어느 때보다도 실행력이 뛰어난 정부가 들어섰으므로 기대해봄 직하다. 물론 시민의 관심과 지원, 장애인 당사자의 참여가 필수다.
장애인이 살기 좋은 사회야말로 누구나 살기 좋은 사회다. 장애인이 지역사회에 참여하면 허술하고 위험한 구석은 물론 그 사회의 강점과 기회를 더 쉽게 찾아낸다. 절박한 사람이 더 잘 보기 때문이다. 누구나 눈 깜짝할 새에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진부할 정도다. 더욱이 고령화로 인해 이제 장애는 모든 사람이 살면서 겪는 보편적 경험이 되었다. ‘장애인권리보장법’의 통과를 열렬히 환영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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