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구이저우성 자오싱(肇興) 동족 마을 풍경. 양희은 제공
중국 구이저우성 자오싱(肇興) 동족 마을 풍경. 양희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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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은 |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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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떠나 길에 나앉으면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격의 없이 깊은 얘기를 나눌 수 있다. 이번 휴가는 중국 구이저우(귀주)·구이린(계림) 등 소수민족 자치구 기행으로 여러 쌍의 부부와 혼자 오신 여성분들과 함께였다. 이상하게 길에서 만난 사이는 짤막한 이야기로도 서로에게 웃음과 치유를 줄 수 있다. 여행이 아니면 어디서 만났으려나? 전혀 모르는 사이인데 도리어 거리낌이 없다. 사진 기록의 여왕이라 불리는 분은 클래식 애호가라 스위스로 떠나 명연주를 들으며 감동하고 행복했단다. 어려서는 엄마가 챙겨주신 대로 입고 다니던 딸이 엄마 가신 후 엄마 옷 그대로 입고 다닌단다. 밝은 얼굴에 귀여운 웃음, 맑은 눈빛이 고왔다. 또 다른 분은 2023년 북부 스페인 여행길에서 봤는데 여행의 고수셨다. 나의 버킷리스트 “아프리카 여행과 오로라 보기”를 말하자 그이는 “가세요. 왜 못 가세요?” 간단한 한마디를 던졌다. 그 말이 가슴으로 들어왔다. “나는 무엇이 내 뒤를 잡아끌어서 못 떠나는가?” 사진 기록의 여왕과 “왜 못 가세요?” 여사를 만난 게 이번 여행에서 제일 흐뭇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쭉 준비해왔다. 근래 10년 동안 필요한 곳은 정부가 지원해서 큼직 널찍한 건물들을 지어놓았다.” 현지 중국분들의 얘기다. 외국어로 된 친절한 안내문도 곳곳에 보였다. 사실 14억 내국인만 상대해도 아쉬울 게 없을 듯했다. 워낙 넓은 땅에 다양한 소수민족이 흩어져 살다 보니 깊은 산속에서 나름 자급자족하는 이들은 파악하기도 어렵단다. 깨끗하지 않고 불편한 화장실이나 모든 게 아무렇지 않은 듯한 무심함에 대한 그간 편견이 무색해지는 순간들이 많았다. 그만큼 중국이 달라졌다. 달라도 너무 달라졌다. 엄청난 넓이의 땅, 14억 인구, 외국서 공부하고 돌아오는 각 분야 인재들, 깔끔하게 관리하는 모든 관광구, 결코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보호 방식과 상주하는 관리인들의 부지런함이 돋보였다. 그리고 전기차들이 워낙 많은데, 움직이는 소리가 잘 안 들리니 여행길에선 사람 쪽이 조심하는 게 우선이다. 아무 소리도 없이 쌩쌩 달리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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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자고 여행 첫날 아침은 비가 추적거리는 구이린(광시성) 리강 유람선 위에서 맞았다. 눈만 돌리면 운무 가득한 수묵화가 따로 없었다. 학교 때 배운 카르스트 지형, 산봉우리 실컷 보고 요산에 올라 첩첩 절경을 누렸다. 그 저녁 장이머우 감독의 야외 공연극인 인샹류싼제(印象劉三姐)를 관람했는데 물 위에서의 공연이 독특했다(‘최 진사 댁 셋째 딸’처럼 유씨 댁 셋째 딸이란 뜻의 제목이다). 계단식 논인 룽지티톈(龍脊梯田)도 놀라웠다. 험한 산세라 농사지을 땅이 얼마나 귀한지! 층층이 쌓은 다랑이논을 보니, 심지어 한줄로 모를 심은 곳도 있었다. 그분들께 존경을 보낸다.

고집스럽게 옛것을 지키며 살아가는 중국 소수민족인 동족, 묘족, 포의족의 소소한 일상 속에서 그닥 눈에 설지 않은 잊혀진 우리의 어린 날이 떠올랐다. 아스라이 그리운 외갓집 동네 풍경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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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구이저우성 랑더 묘족 마을 민속공연에서. 양희은 제공
중국 구이저우성 랑더 묘족 마을 민속공연에서. 양희은 제공

버스 안에서 매일 기본 3시간 이상을 보내는 기나긴 여정. 마지막 날엔 만개의 봉우리가 이룬 숲이라는 뜻을 지닌 구이저우성 완펑린(萬峰林) 풍경구와 유채꽃밭이 유명한 윈난성 뤄핑까지…. 유채가 절정이었다면 야광 빛 도는 노란 꽃밭에 현기증을 느낄 것만 같았다. 어린 날 추위가 풀리면 채소 장수가 손수레 가득 유채나물을 싣고서 “하루나 사려어~” 외치고 다닌 기억이 새롭다. 서울시 면적의 90%에 맞먹는 유채밭이라니! 멀미가 날 지경. 검은 현무암 담장 안에 아담한 유채밭, 그 너머 푸른 제주 바당이 그리웠다.

유채꽃밭이 유명한 중국 윈난성 뤄핑에서. 양희은 제공
유채꽃밭이 유명한 중국 윈난성 뤄핑에서. 양희은 제공

구이저우성 쪽 음식에는 독특한 맛과 향이 있다는데 입에 잘 맞았고 유기농 채소들이 달고도 맛났다. 그 덕에 여행 내내 채소 반찬을 꽤나 즐겼다. 참마, 그린빈, 어린콩깍지, 어린느타리버섯, 샐러리, 유채나물 등을 삼삼하게 볶아서 빨간 고추 잘게 썰어 보태니 쌈빡했다. 끼니때마다 소, 돼지, 닭, 오리는 빠지지 않았는데, 돌아와서 당분간 육류 사양하고 싶어졌다. 과일도 배, 대추, 사과, 비파, 망고, 딸기, 귤 등이 최상급이었다. 당도도 과즙도 잊을 수 없는 맛이었다.

오랜만의 휴가는 여행의 설렘을 주었지만, 그다음 도전을 당분간 접게끔 했다(가슴만 떨리는 게 아니라 무릎도 같이 떨려서 그야말로 혼쭐이 나버렸다). 우리 나이를, 무릎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저 가까운데, 이동 많이 안 하는 곳, 많이 걷지도 않는 곳, ‘집콕’을 사수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