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호는 노래와 그 배후, 그 노래에 기대어 살았던 사람들의 삶에 주목했다. 시간이 지났다고 다 역사가 될 수 없고, 녹음한 인터뷰도 다 믿을 수 없다. 박찬호는 냉정히 선별했고, 철저히 검증했다. “확인하지 않은 사실은 쓰지 않았다.” 불원천리로 돌며 찾고 물을 때, 땀이 흥건했을 터다. 그렇게 ‘축축한 건조체’로 완성한 것이 ‘한국가요사’였다.

유행가는 3분의 승부다. 1900년 초, 유성기판의 한 면에 3분을 녹음했기 때문이다. 훗날 기술이 발달하고 매체가 달라져도 3분은 게임의 법칙이 되었다. 가수가 기염을 토한 3분의 배후에는 작사, 작곡, 제작이 있다. 박찬호(朴燦鎬, 1943~2024)는 노래와 그 배후, 그 노래에 기대어 살았던 사람들의 삶에 주목했다. 책의 제목을 ‘목포의 눈물, 한국 민중의 노래와 정한’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목포의 눈물’은 일본인들에 낯설다는 출판사의 판단으로 ‘한국가요사’가 되었다.
1996년 선생의 작업실, 길을 잃어버릴 정도로 책과 음반이 가득했다. 수십권의 스크랩북에는 신문 자료들이 누렇게 붙어 있었다. 시간이 지났다고 다 역사가 될 수 없고, 녹음한 인터뷰도 다 믿을 수 없다. 박찬호는 냉정히 선별했고, 철저히 검증했다. “확인하지 않은 사실은 쓰지 않았다.” 불원천리로 돌며 찾고 물을 때, 땀이 흥건했을 터다. 그렇게 ‘축축한 건조체’로 완성한 것이 ‘한국가요사’였다.
‘울며 헤진 부산항’을 신청했더니, 유성기판을 걸고 바늘을 올렸다. 유성기판은 소리골의 마모가 쉬워 한곡 듣고 바늘을 바꾼다. 그래서 보통은 원본을 보존코자 따로 녹음테이프에 옮겨서 듣는다. 선생은 원본에 바늘을 올려, 마모를 감수한 라이브를 펼쳐주었다. 판의 수평이 기울어 흔들리는 회전, 이 불안감이 몰입감을 극대화했다. 그렇게 바늘에 직직 긁히는 빗소리를 따라 판의 미로에 들어갔다. 해마다 5월이면 나고야 ‘놀이판’의 강습에 갔고, 선생의 작업실에 입장하였다.
역사란 훗날을 위해 스스로 증거를 남겨둔다는 생각이다. 시대를 흔든 노래를 담은 유성기판은 엘피(LP) 음반이 등장하자 턴테이블에서 퇴장했다. 레이블이 떨어진 채 구르다가 단 몇그램의 물자가 되어 단추 공장에 실려 갔다. 그러나 단추 환생을 거부하고 숨은 판이 있었고, 그 판을 수색하는 추적자들이 있었다. 청계천이나 황학동의 고물상을 돌며 판을 수소문했고, 강태공이 바늘로 시간을 낚듯이 경매 누리집에서 판을 기다렸다.
‘꼬챙이 장난’이란 못된 말이 생각났다. 아편을 주사기에 담아 제 몸에 꽂는다고 ‘꼬챙이 장난’이다. 옛 국악인들의 은어인데, 그야말로 금지된 장난이다. 유성기판을 찾아 바늘을 올리는 시간의 프로파일러들, 모두 그 장난에 빠진 사람들 같았다. 그들은 판을 모았고, 나는 그들을 모아 판을 만들었다. 공연 ‘반락’(盤樂)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나선 그들의 발품에 대한 나의 오마주였다. 2010년 첫 공연에 고음반 연구의 최전선에 있는 양정환, 정창관, 배연형을, 이듬해 멘토들의 멘토인 이보형, 김호성, 박찬호를 올렸다.

2011년 10월5일, ‘박찬호의 반락’ 공연이 열렸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조선 음반을 듣다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쇼지 타로(東海林太郎, 1898~1972)의 구슬픈 미성에 빠졌다. 판을 사 모으고 신문의 가요 기사를 오렸다. 고등학교 때는 쇼지 타로를 찾아가 만났고, 대학도 그가 나온 와세다대에 입학했다. 노래에 빠져 명문대생이 된 것이다. 공연 내내 더듬었지만, 명쾌한 한일의 가요 교류사는 좌중을 사로잡았다. 쇼지 타로는 1935년 ‘국경의 거리’(国境の町)를 불렀고, 1935년 한국에서 김영길이 ‘국경의 밤’으로 번안해 불렀다. 또 1937년 장세정의 ‘연락선은 떠난다’는 1951년 일본에서 ‘연락선의 노래’로 번안돼 히트했다고 한다. 공연의 끝에 관객의 요청으로 ‘번지 없는 주막’을 불렀다. “아주까리 초롱 밑에 마주 앉아서/ 따르는 이별주는 불같은 정이었소….” 가사에 심취한 바이브레이션의 끝자락이 이내 찡하게 울렸다.
어느 해 5월, 나도 서당 개 3년의 풍월을 읊었다. 한일 양국의 가요가 비슷한 정서인데, 고향은 정반대라고 했다. “일본은 북, 한국은 남.” 일본은 ‘북녘의 봄’(北國の春), ‘츠가루 해협의 겨울 풍경’(津軽海峡冬景色)처럼 척박한 홋카이도나 동북지방에서 도쿄로 내려와 북의 고향을 그리워하거나, 사랑의 상처를 입고 북으로 돌아간다. 한국은 북으로 가면 큰일 난다. ‘빗물이 흐르건, 내 눈물이 흐르건’ 무조건 ‘남행열차’를 탄다. 월남한 실향민의 노래도 흥남부두나 대동강 같은 장소를 명기해 북이란 글자를 피한다. 이것이 분단이 가요에 미친 영향이라고 했다. 선생이 “좋은 발견이군요” 하며 웃었다.
2017년 6월, ‘박찬호의 담담풍류’는 선생의 마지막 한국 무대였다. 공연의 마지막에 선생이 작곡한 ‘내 마음의 눈물’을 불렀다. “내 마음의 눈물은 끝이 없구나/ 자유 찾는 벗들의 신음 소리가….”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전, 미국 댈러스행 비행기 안에서 김대중 선생이 쓴 시에 곡을 붙인 노래였다. 어릴 적부터 일본식 이름에 자신을 숨겼는데, 대학에서 ‘조선어 독본’을 손에 잡았다. 1965년 모국 방문 후 일본 이름을 버리고 박찬호가 되었고, 한청(재일한국청년동맹) 활동과 김대중 구출 운동 등에 참여했다. 1977년 말부터 1984년까지 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기관지인 ‘민족시보’에서 편집차장, 편집장을 역임했다. 이후 한국가요사 집필에 전념하였다.
2023년 5월, 5년 만에 선생을 다시 만났다. 그간 공공기관장을 맡아 움직일 수 없었고, 뒤에는 코로나19로 놀이판의 강습이 멈춰 있었다. 팬데믹 시기인 2020년, 나는 ‘궁중문화축전’을 홍보하기 위해 ‘방탄소년단(BTS) 공연 추진 태스크포스(TF)팀’을 꾸렸다. 판이 커져 미국 엔비시(NBC) ‘지미 팰런쇼’ 방영으로 바뀌었다. 이때 경복궁에서 방탄소년단과 악수한 것을 선생에게 전해주었다. “방탄소년단이 빌보드 핫100 차트 1위일 때, 7명의 멤버 전원과 악수한 사람이 지구촌에 몇이나 될까요?” 한국가요사의 최고 권위자 박찬호 선생에게 알엠(RM), 진, 슈가, 제이홉, 지민, 뷔, 정국의 이름으로 일곱번의 악수를 했다. 선생은 크게 웃으며 즐거워했다. 그러나 지난해 5월3일 기력과 기억력이 몹시 쇠해 있었고, 9월25일 향년 81로 타계하였다.
지난 1월10일, 박찬호 선생의 영정과 신주함에 담긴 경추 2번이 뒤늦은 문상객을 맞았다. ‘노도보토게’(喉佛)로 불리는 경추 2번, 정말 부처가 가부좌한 모습이었다. 공덕이 많은 사람이라야 이런 모양이 나온다 했다. 1987년 일본어로 ‘한국가요사’를 출판했고, 1992년 현암사에서 번역본을 냈다. 그리고 2009년 미지북스의 ‘한국가요사 1·2’, 민족사를 1412쪽으로 요약했다. 그때 이미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이후 2018년에는 ‘한국가요사 1·2’를 일본어로 출판했다. 다 이루었다는 듯, 영정 사진 속 선생이 환히 웃고 있었다.
식당의 마당으로 나오니 선생의 2층 작업실이 망루처럼 서 있었다. 가득하던 유성기판은 2015년 이준희(옛 가요 전문 연구자)에게 이관되었다. ‘한국가요사 2’를 쓸 때 지팡이처럼 도운 ‘박찬호 키드’였다. 빼곡하던 도서와 자료들은 2018년 고향인 전북 장수군으로 옮겨졌다. 건강을 염려한 선생이 서둘러 진행한 일이었다. 가로 6.6m, 세로 6m, 높이 2.2m의 공간. ‘꼬챙이 장난’처럼 바늘을 올리는 선생을 보았고, ‘반락’ 공연을 구상했다. 한 시절 한무릎 공부한 깨달음의 방이었다.
노래의 무게는 얼마일까. 유성기 음반은 한장에 200g으로 양면에 두곡이 담기니 한곡은 100g, 엘피 음반은 140g의 판에 10곡이니 한곡은 14g, 시디(CD) 음반은 15g의 판에 10곡이니 한곡은 1.5g, 그리고 음원의 시대가 도래해 0이 되었다. 이 스트리밍의 시대,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 등이 지구촌을 장악했고, 케이(K)팝의 경제 효과가 국가의 긍지가 되었다. 이 밑바탕에는 식민지와 분단, 전쟁과 독재의 시대를 이겨낸 ‘한국 민중의 노래와 정한’이 있다. “또한 이를 기록한 당신의 1412페이지가 있습니다. 이제 유행가는 국력이 되고 민족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부디 영면하소서.”

진옥섭 | 담양군문화재단 대표이사.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소룡의 ‘당산대형’을 보고 ‘무(武)’를 알았고, 탈춤과 명무전을 통해 ‘무(舞)’에 빠져들었다. 서울놀이마당 연출로 서울굿을 발굴하면서 ‘무(巫)’에 심취했고, 초야를 돌며 기생, 무당, 광대, 한량 등 숨은 명인을 찾았다. ‘남무, 춤추는 처용아비들’, ‘여무, 허공에 그린 세월’, ‘전무후무(全舞珝舞)’를 올리며 마침내 ‘무(無)’를 깨닫게 되었다. 이 사무친 이야기를 담은 ‘노름마치’를 출간했고, 무대와 마당을 오가며 판을 만들고 있다.

![“지시도 없고 뛰지도 않고…남아공전 패배 책임, 감독 7·선수 3” [전문가의 눈]](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6/0626/53_17824600902194_5217823593890854.webp)











![[단독] 장동혁, 퇴원 하루 만에 또 ‘올공’…“마음 불편해서”](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257/154/imgdb/child/2026/0626/53_17824325710824_20260626500338.webp)




















![김민석 45%, 정청래 24%, 송영길 15%…민주 지지층 당 대표 선호도<font color="#00b8b1"> [갤럽]</font>](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6/0626/53_17824376543744_20260626500902.webp)




![<font color="#00b8b1">[현장]</font> 서울국제도서전 맞선 ‘서울제대로도서전’ 뜻밖 흥행 <font color="#00b8b1">[.txt]</font>](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6/0626/53_17824612278244_20260626502243.web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