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발한다.”
1898년 1월 프랑스 문호 에밀 졸라가 일간 <로로르>(l’aurore·여명)에 쓴 격정적인 공개서한은 ‘드레퓌스 사건’의 양상을 되집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러나 드레퓌스 사건이 공공의 관심을 끌게 되기까지는 에밀 졸라의 극적인 개입보디 아내와 형 등 가족이 연대가 중심적 구실을 했다고 영국 <가디언>의 일요판 <옵서버>가 6일 보도했다. 옥스퍼드대 역사학 강사인 루스 해리스가 드레퓌스가 주고 받은 수천통의 미공개 편지를 토대로 쓴 신간 <악마의 섬의 남자: 드레퓌스 사건과 분열된 프랑스>를 인용했다.
드레퓌스 사건은 1894년 프랑스 정보당국이 파리 주재 독일대사관에서 빼내온 정보서류가 당시 참모본부의 유대인 포병장교였던 알프레드 드레퓌스와 필적이 비슷하다는 유일한 이유로 그에게 간첩죄로 종신유배형을 선고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날조서류 제출자가 자살하고 군부의 거짓이 드러나면서 프랑스 사회가 들끓은 끝에 1906년에야 무죄가 확정됐다.
묵묵히 고통을 이겨낸 현모양처로만 그동안 그려졌던 드레퓌스의 아내 루시는 공개된 편지에서 남편에 대한 열정적 사랑을 드러냈다. “당신 없인 살 수 없어요”라며 아이들을 포기하고 남편과 함께 추방될 결심까지 한 아내의 절절한 사랑은 벼랑 끝에 몰렸던 드레퓌스의 자살을 막아냈다.
드레퓌스의 형 마티외는 1895년 편지에서 “진범은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며 “시시한 위로 따위는 않겠다.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로 너의 이름에 따라붙은 경멸과 수치가 결코 너의 머리를 숙이게 할 수 없다고 너 자신에게 말하라”고 동생을 다부지게 일으켜 세웠다. 이때 이미 마티외는 동생의 구명운동을 조직하고 있었다.
졸라의 편지 이후 한참동안 드레퓌스 옹호자들이 궁지에 몰렸던 것은 졸라에 대한 부정적 세평이 큰 원인이었던 것도 새롭게 밝혀졌다. 드레퓌스를 변호했다가 영국에 망명길에 오르던 졸라가 그의 정부와 혼외 자녀들을 데려간 것이 문제가 됐다. 드레퓌스는 졸라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점을 우려했지만, 졸라는 오히려 “걱정해주어서 고맙지만 나는 개의치 않는다. 난 충분히 당했다!”고 답했다.
드레퓌스 사건은 진실과 위신, 편견과 상식, 개인의 자유와 조직의 명예가 정면 충돌했으나 결국 진실이 승리한 상징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졸라는 드레퓌스의 무죄 확정이 나기 2년 전 의문의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숨을 거뒀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드레퓌스 자살 막은 ‘가족의 힘’
- 수정 2019-10-19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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