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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8일 일본인 ㅇ씨는 엔화 현금 다발이 가득한 여행가방 2개를 끌고 인천공항에 입국했다. 가방에 든 현금 다발은 모두 1만엔짜리로 총 3억2000만엔(우리돈 47억원)에 이르렀다. ㅇ씨는 세관에 이 돈을 우리나라에서 쓸 사업자금으로 신고했다. 외국인의 경우 1만달러(약 1180만원) 이상의 사업자금은 신고만 하면 무제한으로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3억2000만엔의 반입은 불법이 아니다.

입국심사를 마친 ㅇ씨는 공항에서 40대의 한 남자를 만나서 가방 2개를 넘기고 바로 일본으로 출국해 버렸다. 이른바 ‘지게꾼’으로 불리는 ㅇ씨의 역할은 거기까지였다. 수출품 포장업자인 이아무개(45)씨는 넘겨받은 가방을 차에 싣고 서울 중구 명동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다. 이씨가 사무실에서 가방을 여는 순간 그를 미행해온 서울본부세관원들이 들이닥쳤다. 사상 최대의 1조4000억원의 환치기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관세청 서울본부세관은 130개의 의류 수출업체 등의 불법외환거래를 대행해주던 무역업체 대표 이씨와 환전상 강아무개(58)씨 등 8명을 외국환거래법 위반 혐의 등으로 불구속해 검찰에 송치하고, 속칭 ‘지게꾼’으로 불리는 일본인 현금 운반책 2명을 지명수배했다고 12일 밝혔다. 이들은 불법외환거래 정도만 가담하던 기존의 환치기 사범들과 달리 밀수출업체를 직접 모집하고 그 수출대금을 외국인 공모자를 통해 국내에 불법으로 들여온 뒤 이를 환전상과 짜고 우리돈으로 환전해 수출업체에 지급해온 ‘원스톱 기업형 환치기 사범’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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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본부세관은 외국인들의 외환 휴대반입에 대한 정보를 분석하면서 국내 사용처가 불분명한 자금의 반입을 발견했다. 이를 정밀 조사하다가 이 자금과 이씨의 연루 정황을 포착했다. 그러던 중 이씨가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한 일본인에게 현금가방을 전달받는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지난달 8일 현장에서 그를 검거한 것이다. 서울본부세관은 이어 압수수색을 통해 확보한 이씨 사무실의 컴퓨터 등의 서류와 거래내역 등을 분석했다. 그 결과 이들이 2007년부터 서울 동대문 일대의 의류 수출업체를 상대로 환치기에 가담할 업체를 모집했고, 업체 130곳이 이들에게 불법 밀수출과 환치기 대행을 의뢰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들이 5년 동안 업체 130곳에서 챙긴 수수료 등 이익이 39억원에 이른다.

이들은 이렇게 불법적으로 들여온 엔화를 국내 환전상들을 통해 우리돈으로 환전했다. 환전상은 피의자들에게 전달받은 밀수출 대금의 불법 환전 사실을 숨기기 위해 자신들이 보관해오던 외국인 여권 사본을 이용해 마치 다른 외국인에게 환전해준 것처럼 서류를 조작했다. 또 당국에 혐의거래 보고를 피하기 위해 보고 기준인 미국돈 5000달러 이하로 대금을 쪼개 불법 환전할 정도로 치밀했다. 관세청은 불법 환치기에 가담한 의류 무역업체 130곳을 상대로 매출 누락과 자금세탁 여부 등에 대해 조사를 확대할 방침이어서 이번 사건과 관련한 밀수출 혐의 및 외환거래법 위반 혐의 기소자들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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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은중 기자 details@hani.co.kr

환치기통화가 다른 두 나라에 각각의 계좌를 만든 뒤 한 국가의 계좌에 돈을 넣으면 다른 국가에 만들어 놓은 계좌에서 공모인이 그 나라의 화폐로 동일한 금액을 찾아 쓰거나 필요한 곳으로 송금해주는 불법 외환 거래 행위를 말한다. 송금 수수료를 안내는 것은 물론이고 송금 내용이나 목적을 당국에 신고하지 않기 때문에 비자금 조성이나 자금세탁 수법으로 악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