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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임윤찬이 3월30일 경남 통영국제음악당에서 독주회를 열어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하고 있다. 통영국제음악재단 제공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3월30일 경남 통영국제음악당에서 독주회를 열어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하고 있다. 통영국제음악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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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1932~1982)가 1955년 혁신적인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녹음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을 때, 23살이었다. 70년이 흐른 지금, 당시의 굴드보다 2살 적은 한국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또 다른 색깔의 독창적인 연주로 이 곡에 화제를 불붙이고 있다. 지난 30일 저녁 경남 통영국제음악당 독주회에서 그는 이 곡을 마치 피아노의 음향 성능이라도 테스트하듯 파격과 도발, 실험을 오가며 자유자재로 연주했다.

올해 통영국제음악제 ‘상주 연주자’로 무대에 오른 그는 19살 작곡가 이하느리의 ‘…라운드 앤드 벨버티-스무드 블렌드…’(…Round and velvety-smooth blend…)로 독주회 문을 열었다. 지난해 버르토크 작곡 콩쿠르에서 우승한 신예 작곡가에게 임윤찬이 직접 위촉해 지난해 12월 완성된 작품이다. 임윤찬은 최근 프로그램북에서 “우리 모두의 음악적 뿌리인 바흐의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고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소개하며, “크게 대조되는 두 곡을 통해 음악이 어떻게 발전해 왔고, 그 뿌리는 어떤 음악이었는지 경험하실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작곡가가 ‘얼음 조각이 유리잔에 부딪히는 이미지’로 비유한 5분짜리 이 곡은 총천연색 음향으로 색칠한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예고편과도 같았다.

친구인 이하느리를 무대 위로 불러 청중에게 소개한 임윤찬은 곧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시작했다. 때론 사납게 질주하며 격정을 토해내더니, 어느새 한없이 간드러지며 숨죽이듯 여린 흐름이 이어졌다. 가끔 손으로 긴 머리를 휩쓸어 올렸고, 빠른 템포에선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며 온몸을 들썩이기도 했다. 임윤찬은 특유의 집중력으로 공연 내내 청중에게 숨돌릴 틈 없는 몰입감을 선사했다. 정확히 78분20초, 기적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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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임윤찬표 골드베르크 변주곡’에서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빈번한 페달 사용이었다. 페달은 울림을 풍성하게 하거나 강약을 섬세하게 조절해 미세한 표현을 가능하게 한다. 임윤찬은 페달을 길게 밟아 잔향에 새로운 음을 덧칠하거나 음을 뒤섞어 1741년 세상에 나온 이 곡을 라흐마니노프의 곡처럼 입체적으로 표현했다. 통영음악당에서 만난 김주영 피아니스트는 “바흐 시대의 하프시코드(피아노 이전의 건반악기)엔 페달이 없었지만 장식음과 꾸밈음을 넣어 원래 연주자 주관이 개입할 여지가 많은 곡”이라며 “임윤찬은 이 곡을 칠 때마다 다른 색깔로 연주할 텐데, 그것이 더욱 기대된다”고 말했다. 노승림 평론가도 “화려한 장식음부터 숨넘어갈 것 같은 루바토(템포의 밀고 당김)까지 즉흥적 감흥으로 끌고 간 연주”라고 평했다.

굴드 이전에 이 곡은 하프시코드 연주자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다. 굴드가 이 곡에 생명을 불어넣은 이후 수많은 피아니스트가 즐겨 연주하면서 이 곡은 피아노 연주의 기준이자 경전이 됐다. ‘애플 뮤직 클래식’을 보면, 이 곡 리코딩 목록이 729개에 이른다. 건반악기뿐만 아니라 현악기와 관악기, 현악사중주, 오케스트라 편곡과 합창곡 버전까지 있다. 그만큼 다양한 해석이 나왔고, 뛰어난 음반이 발매됐다. 최근에도 피아니스트 랑랑, 비킹구르 올라프손 등이 나름의 해석을 제시하며 이 곡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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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새로운 무엇을 보태기 위해 21살 임윤찬은 이 곡에 도전했을까? 임윤찬은 전통적인 해석에서 벗어난 과감한 변형을 시도했다. 284년 전에 만들어진 이 바로크 음악을 해체·분해·조립하고 다른 색깔을 입혀 완전히 새롭게 변형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2개의 ‘아리아’(주제) 사이에 30개의 변주를 넣어 수학적 구조로 쌓아 올린 이 곡은 반복 구간이 많은데, 그때마다 다른 식으로 연주했다. 음의 셈 여림과 템포의 밀고 당김 등 다양한 요소에서 차별화된 해석을 선보였다. 진회숙 음악평론가는 “임윤찬의 연주를 통해 바흐가 얼마나 위대한 음악가인지 새삼 감탄하게 됐다”고 말했다. 박문선 대원문화재단 사무국장은 “바흐가 현대 피아노로 작곡했다면 이런 식으로 연주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라고 했다.

올해 통영국제음악제 상주 연주자로 나선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30일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하는 모습. 통영국제음악재단 제공
올해 통영국제음악제 상주 연주자로 나선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30일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하는 모습. 통영국제음악재단 제공

임윤찬은 오래전부터 이 곡을 입에 올렸다. 2022년 인터뷰에서 그는 “제 마음속에 있는 음악의 빅뱅”이라고 이 곡을 소개했다. 뭔가 풀리지 않을 때면 이 곡을 연주하며 해소할 정도였다. 그가 처음으로 구입한 박스 음반에도 굴드가 연주한 이 곡이 있었다. 아마 무수한 시간을 들여 이 곡을 분석하고 탐구하고 연습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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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윤찬은 국내에 앞서 미국 몇몇 도시에서 이 곡을 선보였다. 현지 반응도 뜨거운 편이다. 여러 매체에 기고하는 평론가 폴 보딘은 “곡의 길이와 대칭 구조, 변주 방식, 대위법의 엄격함, 음악적 스타일 등에서 이 곡은 바흐 당시 기준으로도 틀을 깨는 파격이었다”며 “그렇다면 임윤찬의 새로운 해석이 바흐의 지지를 받을 거라고 확신한다”고 평했다. 임윤찬은 다음 달 파리와 빈, 아부다비, 뉴욕, 워싱턴을 넘나들며 이 곡을 연주한다.

“자신만의 규칙이 있었고, 자신만의 길을 걸었으며,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 쓰지 않았고, 세상이 자기 뜻을 따르게 했다.” 뉴욕타임스 평론가로 활동했던 해롤드 손버그가 명저 ‘위대한 피아니스트’에서 굴드를 묘사한 부분이다. 특유의 몰입과 집중력, 예술을 대하는 구도자적 태도, 어떤 전통이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과 독창성에 대한 집착 등에서 임윤찬을 떠올리게 한다.

통영/임석규 기자 sk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