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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 모델
대니얼 A. 벨 지음, 김기협 옮김/서해문집·1만9500원

우리는 겨우내 촛불을 들었고 마침내 박근혜씨를 대통령의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벅찬 감격이었다. 하지만 이 승리는 역설적으로 민주주의, 특히 1인1표의 선거제도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한다. 인품도 능력도 변변찮은 사람이 어떻게 대통령이 됐지? 그리고 그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말마다 광장으로 뛰쳐나와야 했나? 촛불혁명을 통해 탄생한 새 정부를 바라보는 마음이 물가에 내놓은 아이 보듯 조마조마한 것도 선거 때문이다. 총선이 3년이나 남았기에 아직도 많은 국회의원들이 맘 놓고 민심을 거스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일만은 아니다. 민주주의 국가의 원조라는 미국에서도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돼 온갖 해괴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영국의 브렉시트 사태, 프랑스 대통령 선거도 여러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다. 이쯤 되면 대의민주주의를 원점에서 되짚어봐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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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문을 품는 사람들에게 <차이나 모델>은 중국을 유심히 살펴보라고 말한다. 책은 자칭 ‘유교 좌파’를 자처하는 캐나다 출신의 정치철학자 대니얼 벨이 2년 전인 2015년에 쓴 건데, 마치 “내가 이럴 줄 알았지”라고 말하는 듯 선거 민주주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중국의 현능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영어의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는 보통 능력주의로 번역되는데, 이럴 경우 메리트(merit)가 포괄하는 능력과 덕성의 의미 가운데 덕성을 빠뜨리게 된다. 그래서 옮긴이는 이를 현능주의(賢能主義)로 번역했다. 어질고(賢) 유능(能)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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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3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개막식에 시진핑 총서기(오른쪽)와 후진타오 국가주석이 함께 서 있다. 이날 시작된 정협과 이어 5일 개막한 전인대 등 양회에서 시진핑 총서기가 국가주석과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올랐다. 중국의 최고지도자는 현능주의에 입각한 수십년의 검증과정을 거쳐 배출된다. 베이징/AP 연합뉴스
2013년 3월3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개막식에 시진핑 총서기(오른쪽)와 후진타오 국가주석이 함께 서 있다. 이날 시작된 정협과 이어 5일 개막한 전인대 등 양회에서 시진핑 총서기가 국가주석과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올랐다. 중국의 최고지도자는 현능주의에 입각한 수십년의 검증과정을 거쳐 배출된다. 베이징/AP 연합뉴스

시진핑 주석이 중국 최고의 권좌에 오르기까지의 수십 년 도정이 현능주의의 대표적 사례이다. 지방 말단 현(縣)급의 초라한 자리에서 시작해 시(市)급, 성(省)급, 부(部)급을 거쳐 중앙위원회, 정치국, 그리고 마침내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이르는 승진의 모든 단계에서 그 정치적 지도력을 입증할 엄격한 심사를 겪어온 것이다. 꼭대기를 향한 경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치열하다. 700만명의 당 간부 가운데 성급이나 부급을 이끄는 자리까지 오르려면 14만 대 1의 경쟁을 뚫어야 한다. 권력의 정점인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들은 대개 웬만한 국가보다 큰 성 두 곳의 성장이나 당서기를 지낸 사람들이다.

1989년 천안문 사태를 겪을 때만 해도 중국도 소련이나 동유럽처럼 몰락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중국의 1당 체제는 무너지지 않았다. 인류역사에서 보기 드문 경이로운 성장을 이어가고 있고, 중국인 대다수는 현행 정치체제를 지지하고 있다. 일본, 한국, 필리핀, 대만 같은 민주국가를 포함한 8개 사회를 대상으로 한 최근의 아시아바로미터 조사에서 자기네 정치체제에 가장 큰 신뢰도를 보여준 것도 중국인이었다. 저자는 이런 힘이 현능주의에서 나온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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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저자는 현능주의의 단점을 인정하고 있다. 우월한 능력을 근거로 선발된 통치자가 권력을 남용하고 정치적 위계질서가 고착돼 사회 유동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 체제의 정당성을 어떻게 납득시킬 것인가의 문제는 현능주의가 안고 있는 최대의 약점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저자는 ‘민주적 현능주의’를 제시한다. 하층부는 민주주의, 상층부는 현능주의를 적절하게 배합하자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작은 공동체 안에서 가장 잘 작동한다는 인류의 경험에서 ‘하층 민주주의’가 도출된다. 그러나 중앙 정부 차원에서는 복잡한 과제들을 다뤄야 하므로 계속해서 공부하고 능력을 키워나갈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현능주의에 대한 인민의 명시적 동의는 필요하다. 주권은 인민에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현능주의 최대 약점인 정당성을 확보할 수도 있다. 이를 위해 지은이는 “언론의 자유와 사회단체 결성의 자유를 늘리면서도 최고지도부에 대한 1인1표식 선거와 공산당 통치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정치조직 결성만은 불허하는 형태의 정치체제”를 국민투표에 부치자고 제안한다. 국민투표가 통과되면 현능주의의 정당성을 확보할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정치개혁의 한 모델로 인정받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중국의 현능주의가 인류의 보편적인 모델이 될 수 있을까? 가까운 미래에는 불가능해 보인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더라도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아보자’는 열망을 실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던가? 또 현능주의로 옮겨가는 과정 또한 민주적 선거를 통해 이뤄져야 할 텐데, 어느 누가 현능주의를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될 수 있을 것인가? 더 결정적인 것은 현능주의는 1당 체제가 아니면 성과를 거두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집권당이 바뀌면 싹 물갈이가 되는데 어떻게 수십년에 걸친 체계적 훈련과 경험 축적이 되겠는가? 그래서 지은이도 “글쎄, 베트남 정도나 있을까?”라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다른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양쪽 체제 모두 “민주주의 사회는 현능주의의 좋은 점을 배움으로써 민주주의 체제를 향상시키고, 현능주의 사회는 민주주의의 장점을 배합함으로써 현능주의 체제를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100년쯤 흐른 뒤라면 “그때 사람들은 도대체 사회를 이끌 지도자를 1인1표의 원칙에 따라 뽑는다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옛사람들이 어떻게 하게 되었는지 궁금해할”지도 모른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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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시대 과거 시험을 치르는 장면. 현대 중국의 현능주의는 과거 제도를 뿌리로 두고 있다.
북송 시대 과거 시험을 치르는 장면. 현대 중국의 현능주의는 과거 제도를 뿌리로 두고 있다.

지은이는 조심스레 의견을 개진했지만 2015년 영문판 출간 이후 많은 서구의 학자로부터 ‘중국 정부의 변호인'이라거나 ‘중국의 현실을 잘 모르고 쓴 글', ‘민주주의 자체를 깎아내리려는 것'이라는 등 비판을 받으며 논쟁의 대상이 됐다. 저자는 2016년 보급판 서문에서 재반박에 나서지만 서구의 동료 학자들이 어느 정도나 수긍할지는 미지수다.

흥미로운 점 가운데 하나는 캐나다 출신의 지은이가 미국의 저명한 사회학자 대니얼 벨과 이름이 같다는 것이다. 미국의 대니얼 벨(1919~2011)은 <이데올로기의 종언>(1960)으로 유명한데, 그는 저서에서 마르크스주의가 현대 산업사회에서 의지할 곳을 잃고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파했다. 그런데 <차이나 모델>의 대니얼 벨은 자본주의와 친연성이 강한 선거 민주주의의 종말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다. 미국의 대니얼 벨은 살아생전에 자신의 예언이 실현되는 것을 목격했다. 캐나다 대니얼 벨의 예언을 확인하려면 꽤 긴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김의겸 선임기자 kyumm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