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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미래를 향한다
한나 모니어·마르틴 게스만 지음, 전대호 옮김/문예출판사·1만6000원

김치찌개를 끓여먹으려고 냉장고를 열었다. 아무데나 쑤셔박아 놓는 습관 때문에 재료가 있기나 하려나 싶었다. 그런데 어라? 기억도 안 나는 돼지고기와 묵은 김치, 두부 반 모, 송송 썰어놓은 파, 다진 마늘이 꺼내기 좋은 곳에 가지런하게 배치돼 있다. 냉장고가 미리 마음을 읽고 준비해놓은 것이다. 아니 김치찌개를 먹으려는 욕구 자체를 냉장고가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독일의 신경생물학자 한나 모니어와 철학자 마르틴 게스만이 함께 쓴 <기억은 미래를 향한다>는 ‘기억’이 이런 ‘마법 냉장고’와 같다고 말한다.

기억이란 이런저런 식재료를 냉장고에 보관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쓰는 것과 비슷하다는 게 기존의 통념이었다. 지금 이 기사를 쓰는 컴퓨터의 저장장치에 비유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들은 기억을 얕잡아보지 말라고 말한다. 기억은 과거 경험을 보존하는 것만이 아니라 항상 새롭게 재처리해서 미래에 유용하게 쓰이도록 만들어 놓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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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5월17일 일어난 ‘강남역 여성 살해사건’ 당시 시민들이 희생자를 추모하며 붙였던 추모 쪽지 등이 1주년을 맞아 서울 대방동 서울시 여성가족재단 2층 성평등도서관의 ‘기억존: 강남역 10번 출구’에 전시돼 있다. <기억은 미래를 향한다>의 지은이들은 기억이 과거를 보존하는 능력이 아니라 미래를 계획하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지난해 5월17일 일어난 ‘강남역 여성 살해사건’ 당시 시민들이 희생자를 추모하며 붙였던 추모 쪽지 등이 1주년을 맞아 서울 대방동 서울시 여성가족재단 2층 성평등도서관의 ‘기억존: 강남역 10번 출구’에 전시돼 있다. <기억은 미래를 향한다>의 지은이들은 기억이 과거를 보존하는 능력이 아니라 미래를 계획하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기억을 재처리하는 게 꿈이다. 그래서 꿈이 중요하다. 저자들은 이를 입증하기 위해 실험 하나를 소개한다. 장애물 경주로가 설치된 상자에 쥐를 집어넣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도록 했다. 물론 쥐의 뇌에는 전극이 꽂혀 있다. 언제 어느 뇌세포가 ‘점화’하는지 기록했다. 그런 뒤 쥐가 잠을 잘 때의 뇌세포도 관찰했다. 그 결과 놀라운 발견이 이뤄졌다. 쥐가 경주로를 돌아다닐 때 켜졌던 바로 그 뇌세포들이 수면 중에도 다시 켜진 것이다. 게다가 뇌세포들이 켜지는 순서가 깨어 있을 때나 잘 때나 똑같았다. 이는 쥐가 잠자면서 정신적으로 낮의 경주로를 다시 돌아다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단순한 반복은 아니다. 꿈속에서 경주로를 돌아다니는 속도가 낮보다 9~20배 빨랐다. 쥐가 잠자면서 달린 최고 속도는 시속 38.5㎞였다. 그러니까 적어도 꿈속에서 쥐들은 우사인 볼트와 맞먹는 ‘번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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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을 압축하고 가속하는 것만이 아니다. 쥐는 꿈에서 경주로 경험 한번만 재생하는 게 아니라 과거 경험했던 비슷한 경주로를 한데 묶어서 재편집하는 재주도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장 유용한 정보와 미래에 중요할 가능성이 있는 내용을 강화하고 보전한다. 쥐의 공간 장악 능력은 점점 완벽해진다. 저자들은 공간 기억을 “단순히 지도창고로 생각하면 안 되고 오히려 매우 역동적인 내비게이션 시스템으로 보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런 점에서 저자들은 ‘꿈의 해석’에서 가장 적극적인 사람들이다. 처음으로 꿈을 분석한 프로이트에게 꿈은 금지된 일(예를 들면 성욕의 발휘)이 일어날 수 있는 장소였다. 그러다가 진화론적인 해석으로 발전했다. 꿈꿀 때 우리는 2억년 전쯤으로 되돌아가 우리가 어류였거나 파충류였던 시절의 무의식 세계로 돌아간다고 본 것이다. 1970년대 학계의 주도적인 해석은, 꿈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저 뉴런 점화가 뇌간의 윗부분에서 일어나고 그 신호가 나머지 뇌에서 이런저런 반응을 일으킬 뿐이라는 것이다. 1980년대에는 꿈이란 그저 잉여 데이터를 폐기하는 것뿐이라는 해석마저 나왔다. 그런데 이제 저자들에게 꿈은 기억의 작동방식이다. 그리고 기억은 과거를 보존하는 능력이 아니라 미래를 계획하는 능력이다. 그러니 우리가 늘어지게 자고 개꿈을 꾸어도 괜한 죄책감에 시달릴 필요는 없을 듯싶다. 다 미래를 위한 저축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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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주는 또 다른 위안은 늙는다고 기억력이 쇠퇴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은 한꺼번에 최대 9개까지의 정보를 머릿속에서 처리할 수 있다. 이른바 멀티태스킹인데, 나이를 먹으면 그 개수가 줄어들 뿐이다. 대신 다른 곳에 능력을 집중할 수 있다. 오랫동안 연마한 업무처리 솜씨는 더 빠르고 능숙하게 처리할 수 있다. 그래서 “망각은 수치가 아니라 진보다.” 심지어 ‘젊음의 샘’이라 부를 만한 신경세포가 60살 즈음에도 세포분열을 하며 새로 만들어질 수 있다고 저자들은 얘기한다. 기존 학설의 전복이다. 그래서 저자들의 주장은 책의 첫머리에 인용된 폴 발레리의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기억은 과거의 미래다.”

김의겸 선임기자 kyumm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