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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화가들은 우리 땅을어떻게 그렸나이태호 지음/마로니에북스·2만8000원

조선 ‘진경산수화’를 대표하는 작품인 겸재 정선(1676~1759)의 <인왕제색도>를 그렸음 직한 위치에서 실제로 인왕산을 바라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인왕제색도>에 묘사된 인왕산이 실제 풍경과 매우 닮긴 했지만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을. ‘진경’(眞景)이라면 그 본래 뜻은 진짜 경치, 실제 모습 그대로라는 것이다. 그런데 <인왕제색도>의 봉우리들은 실제 모습보다 높고 봉우리들 사이는 가까워 마치 실제 풍경의 좌우를 압축해 위아래로 늘여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 그나마 겸재의 그림들 중에서 실제 풍경과 가장 닮은 게 <인왕제색도>다.

이태호 명지대 교수(미술사학)는 <옛 화가들은 우리 땅을 어떻게 그렸나>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겸재가 그린 진경 작품의 현장을 답사하면 과연 실제로 그곳을 보았을까 의심이 들 정도로 닮게 그린 예가 거의 없다. 아마 1751년 작 <인왕제색도>를 제외하고는 실경과 닮지 않게 그리기로 일관한 듯하다.” 이 교수에 따르면 <인왕제색도>는 인왕산 실제 풍경의 70% 정도만 닮았다. 그의 나머지 그림들은 그 수치가 50% 이하다. 이를 현장 답사를 통해 일일이 확인한 것이 <옛 화가들은…>이 지닌 최대 특장점 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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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의 또 다른 대표작들인 <금강전도>나 <박연폭>은 실재하는 금강산이나 개성의 박연폭포와 매우 다르다. 겸재가 그린 많은 금강산 그림들은 현실의 금강산의 어느 측면을 부각하기 위해 그 부분을 과장하거나 조감도처럼 내려다보기도 한다. 문제는 자세한 묘사와 관련한 기술적인 차이 차원이 아니다. 구도 자체가 전혀 다르다.

특히 <박연폭>은 같은 대상을 묘사한 것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다르다. 그런데 묘하게도 사람들은 겸재의 <박연폭>이 사진보다 훨씬 더 실제의 박연폭포답다고 생각한다. 이 교수는 서양의 원근화법을 도입해 실경에 더 가까운 박연폭포를 그린 강세황의 <박연>과 <박연폭>을 이렇게 비교한다. “정선의 <박연폭>에서는 폭포수의 굉음이 들리는 듯하지만 강세황의 그림은 그런 맛이 감소돼 있다.” “정선은 음양과 강약 논리로 긴 것은 더 길게, 즉 폭포의 길이를 실제보다 두 배가량 늘여서 표현하였다. (…) 비록 <박연폭>이 실경의 외형을 닮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는 물줄기의 기세를 실감케 해준다. 정선은 폭포소리의 리얼리티와 물줄기의 이미지를 그렇게 합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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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진경산수화란 도대체 무엇인가? 겸재의 진경산수화는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실경산수화가 아니다. 진경이란 ‘실재하는 경치’라는 의미도 있지만 ‘진짜 경치, 참된 경치’라는 의미도 있다. 그것은 곧 겸재가 속했던 조선 사대부, 그중에서도 서인·노론 집권세력의 성리학적 이상향인 ‘선경’(仙景)의 의미가 내포돼 있다고 이 교수는 본다. 겸재는 대상을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자신의 머릿속에서 재구성한 이상적인 모습을 그렸다.

중요한 것은 그의 산수 묘사가 조선 사대부들이 이상적 모델로 간주해온 중국 문인들의 전통적인 수묵화 기법과 결별했다는 점이다. 그의 산수화는 중국의 관념산수화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눈앞에 실재하는 조선 산수를 실제 모습에 가깝게 그렸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것이었다.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지 않고 과장, 생략, 압축, 부감, 시점 이동, 조합 등을 통해 대상을 변형하되 묘사의 디테일은 중국 관념산수화의 그것이 아니라 조선의 실제 풍경에 가까운 조선적인 특색을 새롭게 창출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진경’이었다. 조선 개국 50여 년 만인 1447년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가 중국풍의 동아시아 산수화의 이념과 형식을 완성했다면, 그 300년 뒤에 나온 겸재의 진경산수화는 조선 풍경에 걸맞은 새로운 회화 양식의 창출이자 회화의 탈중국·조선화의 시작을 알린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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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을 포함한 30여년간의 현장 답사 체험을 토대로 한 지은이는 영조대를 풍미한 겸재를 중심에 놓고, 겸재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지만 실경 쪽이 훨씬 더 강화된 정조대의 단원 김홍도(1745~1806)를 또 하나의 축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김윤겸·정수영 등 겸재의 후예들과 한시각·신익성 등 겸재 이전 진경산수화의 맹아들, 그리고 단원의 후예들과 이응노·변관식·강요배에 이르는 흐름들을 짚었다.

이 책은 2010년에 출간됐다 절판된 것을 보완해서 다시 낸 것이다. 그림들을 키우고, 현장의 실경 사진들을 그림 속 풍경에 더 가까운 각도에서 찍은 것들로 교체했으며, 일부 내용을 수정했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