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최승자(74)의 첫 시선집이 출간됐다. 이를 기해 올봄 남긴 ‘시인의 말’에 “봄은 봄이지만 늘 맞던 봄이 아니라 처음으로 맞는 봄 같다”고 시인은 썼다. 시집 제목은 두번째 시집 ‘즐거운 일기’(1984)에 수록된 시와 같다. 지난 5월 이번 시집의 원고를 보던 최 시인(오른쪽, 문학과지성사 제공)과 2009년의 최 시인(난다 제공)
시인 최승자(74)의 첫 시선집이 출간됐다. 이를 기해 올봄 남긴 ‘시인의 말’에 “봄은 봄이지만 늘 맞던 봄이 아니라 처음으로 맞는 봄 같다”고 시인은 썼다. 시집 제목은 두번째 시집 ‘즐거운 일기’(1984)에 수록된 시와 같다. 지난 5월 이번 시집의 원고를 보던 최 시인(오른쪽, 문학과지성사 제공)과 2009년의 최 시인(난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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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이 나라의 법전일 수 있다면, 1980~90년대 스무살 서른살 여자의 새 규범은 최승자(74)가 만들었을 법하다. 1979년 함께 등단하여 함께 전복의 시 세계를 열었던 김혜순(71) 시인과 또한 함께일 텐데, 김 시인은 말한 바 있다. “그때 나의 여성 시인 선배는 없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최 시인이 등단 2년 뒤 펴낸 첫 시집 ‘이 시대의 사랑’ 속 ‘올여름의 인생 공부’가 그 시대 돌연한 규범의 조문 하나가 된다.

“그러므로, 썩지 않으려면/ 다르게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다르게 사랑하는 법/ 감추는 법 건너뛰는 법 부정하는 법./ 그러면서 모든 사물의 배후를/ 손가락으로 후벼 팔 것/ 절대로 달관하지 말 것/ 절대로 도통하지 말 것/ 언제나 아이처럼 울 것/ 아이처럼 배고파 울 것/ 그리고 가능한 한 아이처럼 웃을 것/ 한 아이와 재미있게 노는 다른 한 아이처럼 웃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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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달함은 무엇인가. 순응, 복종, 침묵 따위가 아닐까. 진부함이 자욱하다. “우리들 꿈의 오합지졸들이 제아무리 집중사격을 가해도 현실은 요지부동”인 세계, “우리의 총알은 언제나 절망만으로 만들어진 것”(‘197×년의 우리들의 사랑’)이 되고. 미국 작가 데니스 존슨의 문장대로라면 “뺨을 맞은 뒤에 따라오는 침묵처럼 조용한”(소설 ‘무덤 위의 승리’) 어떤 상태다.

시인은 ‘봄’의 정념도 규범으로 불러온다. ‘광기’에 가까운 규범은 다만 낙관할 수 없으므로, 시집 ‘내 무덤 푸르고’(1993)에 수록된 시 ‘봄’은 회한까지 짐짓 예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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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도 피우기 전에 꽃부터 불쑥 전시하다니,/ 개나리, 목련, 이거 미친년들 아니야? 이거 돼먹지 못한 반칙 아니야?)// 이 봄에 도로 나는 환자가 된다./ 마음 밑 깊은 계곡에 또다시/ 서늘한 슬픈 물결이 차오르고/ 흉부가 폐광처럼 깊어진다.”

이달 나온 최승자 시인의 시집에서 시공간을 가로질러 한목에 만나는 시들의 여전히 불온한 형상이다.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제목의 이번 시집은 시력 47년, 전체 8권 시집을 압축한 최 시인의 첫 시선집이다. 시인을, 시집을 청춘 시절 만나 벼락 맞듯 ‘감전’되었던 여성 시인 9명이 시를 고르고, 제 글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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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갓 입학해 시집을 사 보고선 “알코올 솜으로 문지를 때처럼 (내 상처에) 쓰라림과 시원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나는 최승자의 시를 통해 처음 소독되었다”고 기억하는, “내가 인생에서 가장 바닥이라고 느꼈을 무렵” 만난 그를 통해 “왜 청춘은 바닥과 닿아있는지” 물을 수 있었다고, 해서 불확실한 자신의 삶을 “시 쓰는 여성의 삶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기억하는, 서점이 하나뿐인 지방의 고교생 때 읽은 그의 시집을 통해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나의 미래를 미리 만난 것만 같”았다고 기억하는 강성은·김소연·김행숙·신해욱·이민하·이원·이제니·진은영·하재연이 그들이다. 기억은 현재형이다. “스무 살에 데었던 시는 지금도 데는 시다.”

살아 있는 시인을 살아 있어 ‘추모’하는 시집을 보았는가. 이때 시집을 엮는 일은 추모가 아니라, 거듭 추동하는 행위가 된다. 최승자를 지금 여기로 불러, 사회와 체제로의 순응이 아니라 ‘우리’의 상처, 고통, 폭로, 충동을 응시하고 결결이 죽음까지 환시하여 환대하려는 몸부림을 현재화한달까. 최승자는 일찌감치 예견했던 것도 같다.

“이상하지,/ 살아 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빈 벌판에서 차갑고도 따스한 비를 맞고 있는 것 같지./…/ 이윽고 어느 날 너는 새로운 눈(眼)을 달고/ 세상으로 출근하리라.//…// 그러나 나의 몫은 이제 깊이깊이 가라앉는 일. 봐라,/…/ 연극적으로 죽어가는 게 실은 나의 사랑인 까닭에.”(‘이십 년 후에, 지芝에게)

2025년 9~11월 서울 광화문 네거리 ‘광화문글판’에 게재된 최승자 시인의 시 구절. 시 제목은 ‘20년 후에, 지芝에게’(1984년 시집 ‘즐거운 일기’ 수록)이다. 교보생명 제공
2025년 9~11월 서울 광화문 네거리 ‘광화문글판’에 게재된 최승자 시인의 시 구절. 시 제목은 ‘20년 후에, 지芝에게’(1984년 시집 ‘즐거운 일기’ 수록)이다. 교보생명 제공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l 최승자 지음, 문학과지성사, 2만8000원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l 최승자 지음, 문학과지성사, 2만8000원

최 시인이 마지막으로 낸 신작 시집은 2016년 ‘빈 배처럼 텅 비어’였다. 2000년 전후 “환청과 환각에 시달리는 병을 얻었”고, 오랜 시간 “정신 병동에 있었”던 시인의 근황을 뚫고 나온 시들이었다. 이번 시선집을 통해 10년 만에 듣게 되는 ‘시인의 말’대로라면 “조현병이라는 절망스런 상황이 수십 년 이어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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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관점에서 최승자는 변모했을망정, 시 세계 안팎으로 최승자는 한결같이 최승자다. 시 ‘나의 생존 증명서는’(시집 ‘빈 배처럼 텅 비어’)을 보면 알 만하다.

“나의 생존 증명서는 시詩였고/ 시 이전에 절대 고독이었다/ 고독이 없었더라면 나는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세계 전체가 한 병동이다// 꽃들이 하릴없이 살아 있다/ 사람들이 하릴없이 살아 있다”

전체 8종의 시집에서 9명 시인의 뜻에 따라 91편이 추려진 가운데, 모두의 선택을 받은 단 한편이 있다.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가면서/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1981년 첫 시집의 시 ‘일찍이 나는’이다. 첫 시집과 끝 시집을 이으니, 병동이라는 세계에서 하염없이 죽던 최승자가, 우리가, 찰나의 너, 당신, 그대, 사랑으로 입때껏 “살아 있다.”

후배 시인 8명이 꼽은 시 ‘삼십 세’,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기억의 집’은 또 어떤가.

최 시인과의 특별한 우애와 이해를 바탕으로 곡진한 해설을 쓴 진은영 시인은 “독자들이 이 시집을 핑계로 슬픔과 절망을 함께 나누며 붐비는 이 공동체를 나는 ‘당돌하고 미친 여자들의 공동체’라고 부르고 싶다”고 했다. ‘우리 여성’의 시는 바야흐로 ‘소외된 모든 청춘’의 시로 확장된다 하면 무람없을까.

정식 배본에 앞서, 지난달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첫선을 보인 이 시집은 닷새 동안 1천부가량 독자 손에 쥐어 나갔다. 문학과지성사 이근혜 주간에 따르면, 그중 최승자를 모르는 이들이 적지 않았고, 자녀에게 줄 시집을 찾던 한 중년 여성이 자신이 오래전 읽던 최승자를 만나 반갑다며 사 간 1부가 또 포함된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