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에서 중립적이거나 부정적인 어감을 지닌 ‘희한하다’가 북한 사전에는 “(좋은 일이나 물건 또는 대상 등이) 좀처럼 볼수 없게 드물고 기이하다”로 풀이되어 있다. 로동신문 2022년 1월9일치 기사 제목에서도 ‘희한한’은 매우 긍정적인 뜻을 지닌다. 황소자리 제공
남한에서 중립적이거나 부정적인 어감을 지닌 ‘희한하다’가 북한 사전에는 “(좋은 일이나 물건 또는 대상 등이) 좀처럼 볼수 없게 드물고 기이하다”로 풀이되어 있다. 로동신문 2022년 1월9일치 기사 제목에서도 ‘희한한’은 매우 긍정적인 뜻을 지닌다. 황소자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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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아이스크림을 ‘얼음보숭이’라는 순우리말로 부른다는 것은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1981년 북에서 나온 ‘현대조선말사전’에는 이 말이 실려 있었지만 1992년 ‘조선말대사전’에서는 빠졌다. 2008년 이후 북한 매체에서는 주로 ‘아이스크림’으로 쓰고 있다. 전구를 ‘불알’이라 한다든가, 입맞춤을 ‘주둥이박치기’로, 라면을 ‘꼬부랑국수’로 쓴다는 것 역시 사실이 아니다. 북한은 1966년부터 한자어와 외래어 대신 순우리말을 살려 쓴다는 취지로 ‘말다듬기’에 나섰다. 그 결과 ‘손기척’(노크), ‘달린옷’(원피스), ‘살결물’(로션) 같은 말들을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한자어와 외래어를 없앤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우수한 언어’라 자부하는 북한 말의 현주소는 어떠할까.

1996년부터 30년 동안 통일부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지은이(정소운 국립평화통일민주교육원 교육운영부장)가 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우수한 말’은 로동신문 등을 자료 삼아 북한 언어의 현실을 알려주는 책이다. 서양화·일본화·한자화를 이유로 “세상에 없는 너절하고 역스러운 쓰레기말”(2023년 제정 ‘평양문화어보호법’ 중)로 치부하는 남한 말에 비해 순수하고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북한 말의 실체가 그들의 표방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 책의 핵심이다.

가령 북한 말에는 ‘그루빠’(그룹), ‘뜨락또르’(트랙터) 같은 러시아어와 ‘바께쯔’(양동이), ‘고뿌’(잔), ‘마이싱’(항생제) 같은 일본어는 물론 ‘콤퓨터’ ‘인터네트’ ‘홈페지’ 같은 영어 외래어가 버젓이 남아 있다. 남한에서 ‘누리집’으로 순화해 쓰는 ‘웹사이트’를 ‘웨브싸이트’로 영어 그대로 쓰기도 한다. ‘고기겹빵’이나 ‘다진소고기빵’으로 다듬었던 ‘햄버거’가 2019년에 다시 규범어가 되었고, 한때 ‘구운빵지짐’으로 불렀던 ‘와플’도 2024년에는 당당히 규범어의 반열에 올랐다. 심지어는 멀쩡하게 잘 쓰던 ‘입쌀’과 ‘입쌀밥’을 버리고 ‘백미’와 ‘백미밥’으로 바꾸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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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 말의 이질화 과정을 확인하는 것은 책의 또 다른 주안점이다. 분단 이후 80여년에 걸쳐 따로 발전해 온 양쪽 언어의 차이를 깨닫는 것이 불필요한 오해를 막고 이해로 나아가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남한에서 상호, 세기말, 성동격서로 쓰는 말들을 북한에서는 호상, 말세기, 동성서격 식으로 뒤집어 쓴다. 화폐, 폐허, 폐쇄 등에 쓰이는 ‘폐’를 저들은 ‘페’로 표기한다. 외치다는 ‘웨치다’로, 젓가락은 ‘저가락’으로, 올바른은 ‘옳바른’으로 쓴다. 남쪽에서 부정의 뜻으로 통하는 소행, 방조, 희한하다 같은 말들이 사뭇 긍정적인 어감을 지니기도 한다.

남한 무인기를 비난하는 김여정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 담화가 하단에 실린 2024년 10월13일치 로동신문 1면에는 노동자와 강사 등 일반 시민들의 원색적인 막말 및 욕설 인터뷰가 소개되었다. 황소자리 제공
남한 무인기를 비난하는 김여정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 담화가 하단에 실린 2024년 10월13일치 로동신문 1면에는 노동자와 강사 등 일반 시민들의 원색적인 막말 및 욕설 인터뷰가 소개되었다. 황소자리 제공

“언어례절을 잘 지키자면 함부로 큰소리를 치지 말아야 하며 반말과 지나친 롱말(농담)을 삼가하여야 한다. (…) 자기보다 직급이 낮다고 하여 반말을 하거나 일이 잘 안되여 속상하다고 하여 신경질을 부리며 상스러운 말로 욕설을 하는것은 자신을 군중우에 올라선 특수한 존재로 여기는 표현으로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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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26일치 로동신문에서 언어 예절을 설명한 기사의 한 대목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기들끼리의 이야기이고, 체제 바깥의 ‘원쑤’에 대해서는 예술에 가까운 욕설과 저주를 퍼붓는 게 또한 북한 말의 특성이다. ‘대갈통을 묵사발로 만든다’ ‘세멘트로 주둥이를 매몰해 버린다’ ‘모가지를 비틀어 끓는 가마에 처넣는다’ 같은 말들은 오히려 약과일 정도로, 기사에 인용하기도 힘든 욕설들이 북한의 공식 매체에는 거침없이 나온다. 지은이는 재미라고는 일도 없는 공식 매체에 이런 “암팡진 욕설과 살기등등한 막말”이 등장하는 “대환장 파티”가 “외부의 적에게 가시를 세우고 냄새를 뿜는 용도를 넘어 (…) 반복되는 뻔한 지루함에 지친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오락이 되어주기도” 한다고 꼬집는다.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우수한 말 l 정소운 지음, 황소자리, 2만3000원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우수한 말 l 정소운 지음, 황소자리, 2만3000원

우리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북한이라 부르는 것처럼 북에서도 남쪽을 가리켜 남조선이라 일컬어 왔다. 그러나 2024년 1월 이후 ‘남조선’이라는 말은 북한의 모든 매체에서 사라졌다. 북한 당국은 ‘대한민국’ 사용을 공식화하고 남북이 통일을 지향하지 않는 ‘적대적 두 국가’임을 선포했다. 북한 헌법에서 ‘평화통일’ ‘민족대단결’ 같은 표현들이 삭제되었고, 평양 지하철 통일역은 ‘모란봉역’으로, 판문점 안 북한 건물 통일각은 ‘판문관’으로 각각 이름을 바꾸었다. ‘통일’이라는 말의 삭제는 통일 염원의 ‘페기’를 뜻하는 것일 테다. 남북 간 언어 이질화가 돌이킬 수 없는 단절로 나아갈 위험 앞에서 북의 언어 현실을 ‘꽝꽝’(흐뭇할 정도로 충분하게) 보여주는 책의 출간이 반갑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