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를 위한 자장가 l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글·그림, 이지원 옮김, 비룡소(2019)
할머니를 위한 자장가 l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글·그림, 이지원 옮김, 비룡소(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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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할머니를 위한 자장가’의 책장을 펼치는 순간, 돌아가신 시어머니의 낡은 장롱 속에 켜켜이 접혀있던 천 다발들이 떠올랐다. 곱게 풀을 먹여 여전히 빳빳한 하얀 천들에 수백번 스쳐 갔을 지난 시간의 손길 때문에 먹먹해졌다.

책은 화자가 50년 뒤에 할머니가 될 ‘아기 훌다’에게 자장가를 건네면서 시작된다. 훌다는 폴란드의 대표적 방직 공업도시인 우츠에서 태어난다. 방직기 돌아가는 소리가 일상인 우츠에서의 삶은 직물과 무관할 수 없다. 훌다는 자연스럽게 어린 방직공이 되고, 결혼하여 아이를 공장으로 데려가 일하면서 키운다. 훌다는 우츠에서 태어난 수많은 여성의 또 다른 이름이다. 작가는 이들의 삶을 기리고 위로를 담은 자장가를 보낸다.

이 책에서는 무엇보다 시각적 요소들이 압도적이다. 작가는 오랫동안 수집한 자수, 아플리케, 뜨개 등으로 만들어진 직물 공예품들을 정성스럽게 배치하여 구성한다. 섬세한 레이스, 천에 새겨진 아름다운 무늬, 한 땀 한 땀이 선명한 자수들이 화면에 어우러져 한참 시선을 머물게 한다. 여기에 누르스름하게 바랜 흔적과 끊어진 레이스, 시간이 만든 주름 등을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모노톤의 실물 사진과 결합한다. 그리하여 그림책은 오래된 서랍을 한칸씩 열어 보거나, 낡은 앨범을 한장씩 펼쳐보는 것 같은 경험을 주는데, 이는 앞 세대 여성 서사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고, 세대를 연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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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방직, 바느질, 퀼팅 등의 직물 작업은 여성들의 전유물이자, 여성 가사 노동에서 가장 기본이었다. 이들은 생활에 필수적인 실용성을 지니면서도 개성을 담은 예술 표현 영역이었다. 또한 문자를 통해 스스로를 전달할 기회가 제한됐던 여성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방식이 되었다. 마치 이 그림책의 이미지가 가족을 둘러싼 여성들의 기억 저장 장치로 작동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할머니를 위한 자장가’에서는 무엇보다 시각적 요소들이 압도적이다. 작가는 오랫동안 수집한 자수, 아플리케, 뜨개 등으로 만들어진 직물 공예품들을 정성스럽게 배치하여 구성한다. 비룡소 제공
‘할머니를 위한 자장가’에서는 무엇보다 시각적 요소들이 압도적이다. 작가는 오랫동안 수집한 자수, 아플리케, 뜨개 등으로 만들어진 직물 공예품들을 정성스럽게 배치하여 구성한다. 비룡소 제공

또한 주목할 것은 그림책에 적용된 ‘여성적 글쓰기’ 방식이다. 페미니즘 비평에서 파생한 이 개념은 이제까지 주류였던 공식성, 논리성, 인과관계 등을 앞세운 기존의 (남성 중심적) 서사 체계에서 간과되었던 것들에 주목한다. 이 책에는 시간적 선형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화자인 손녀는 할머니의 어린 시절, 아직 유아였던 훌다에게 말을 건네는 형식을 취한다. 서술 역시 작가의 의식의 흐름에 따른 1인칭 내레이션으로 이어지며, 의미는 지극히 파편적으로 제시된다. 개인인 훌다의 성장 이야기인 듯하다가, 천에 관한 이야기로 옮겨 가고, 직물을 둘러싼 여성 서사가 등장한다. 전쟁과 방직공이라는 사회적 주제는 지극히 사적이고 자전적 서술 방식으로 다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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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텍스트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각 장의 이미지를 살펴보면 이들 사이에 인과관계나 위계는 없다. 병렬적이며, 수평적으로 나열되어 있다. 그리하여 글과 그림의 결합을 통해 자유롭고 지극히 사소하지만 여성의 서정적이고 따뜻한 배려를 드러낸다. 결국 이 책은 여성 서사의 서술 방식으로서 ‘여성적 글쓰기’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여성의 이야기와 세대를 관통하는 관계성을 효과적이며 성공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조은숙 그림책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