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등단 작가 김솔(51)이 신작 장편소설 ‘행간을 걷다’를 펴냈다. 직장 생활과 창작을 병행하는 그는 “존재와 존재, 의식과 의식, 기억과 기억 사이에 드러나지 않는 틈새를 들여다보고 싶은 열망에서 선택한 제목”이라고 출판사에 말했다. 현대문학 제공
2012년 등단 작가 김솔(51)이 신작 장편소설 ‘행간을 걷다’를 펴냈다. 직장 생활과 창작을 병행하는 그는 “존재와 존재, 의식과 의식, 기억과 기억 사이에 드러나지 않는 틈새를 들여다보고 싶은 열망에서 선택한 제목”이라고 출판사에 말했다. 현대문학 제공

행간을 걷다
김솔 지음 l 현대문학 l 1만5000원

지난주 김종옥 작가의 소설집을 계기 삼아 동년배의 ‘스타일리스트’ 남성 작가로 김솔을 한 줄 소개한 바 있다. 기다렸다는 듯 그의 신작 소설이 나왔다. 작가 김솔(51)의 스타일이자 문학관을 가로지르는 한마디부터 되새겨본다.

“진리는 문자에 (거의) 담기지 않고 여백에 (겨우) 담긴다는 진리를 정작 책은 (애써) 외면한다.” 지난해 펴낸 소설집 ‘말하지 않는 책’에 부친 작가의 말이다. 과연 그렇다, 그가 새겨둔 활자만 좇다 보면 독자는 활자의 미로에 갇혀버릴지 모른다. 소설은 전통적 구성을 따르지 않는다. 따라서 구성요소별로 분별되기도 어렵다. 여러 평자들은 이를 김솔 작품의 ‘비결정론’으로 설명하곤 한다. 쪼개고 나눔이 밝혀지고 이해함(分かる, 와카루)이라는 일본어에 따르면 김솔은 얼마나 아득할까. 기승전 뒤의 결미가 긴요한 독자에게 ‘결정되지 않음’은 그 자체로 불온하다. 가령 걷는 여자 1인을 등장(단편 ‘걷는 여자, 걷는 남자’)시켰을 뿐인데도 그의 서사는 낯설고 무한하고, 무한히 수상쩍다. ‘걷는다’는 시공간의 구체성을 전제하는 행위임에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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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솔이 전개시키는 비결정적 세계는, ‘미래는 열려 있다’보다 ‘과거조차 닫히지 않는다’ 쪽에 가깝겠다. 투고 및 발표 이후를 포함해 모두 다섯 차례 퇴고했다던, 말하자면 마감된 작품의 과거조차 또 열고 열었던, 신작 장편 ‘행간을 걷다’의 행색이다.

주인공 ‘나’는 환갑에 이르러 뇌졸중으로 오른쪽이 마비된다. 오른손잡이였던 ‘나’는 “권태와 허무 사이를 오가다가 여생을 소진하게 될 것”이라 비관하지만, 막상엔 본격적으로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화하며 과거를 욕망함으로써 또 다른 자아를 낳는다. 분열이다. (주인공이 많아진다는 얘기다) 심지어 기억은 기억을 넘어선다. “순차적으로 전개되지 않는 인생에서 기억과 망상을 거의 구분할 수 없”는 지경으로서, 그 세계가 바로 또렷한 ‘행’과 ‘행’의 묘연한 사이일 것이다. (주인공 주변이 복잡해진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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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는 시간이면서 ‘비밀’을 품는 공간이다. 주인공 여럿 가운데 ‘비밀의 나’를 우선 호명해보자. 서른살 어린 여자와 결혼했으나 깡패까지 동원하며 결혼을 반대했던 장모가 살해당했다. 나는 강하게 의심받았지만 혐의를 벗는다. 이후도 살인범 취급하는 아내와 반목하며 10년가량 살았다. 애초 극성스런 어머니로부터의 도피처로 내가 선택되었을 것이다. 아내는 여러 해 외도 중이다. 소설 말미 뜻밖의 상대 정체가 드러난다. 나는 마비된 나와 대결한다, 아내에 대한 애정과 증오, 연민과 앙심 사이, 하여 이혼할 것이냐, 유산을―어떻게―줄 것이냐 등등. 나의 ‘원죄 의식’도 드러난다. 10대 때 만난 소녀의 자살에 연루되어 있다. ‘원죄’란 게 실수 하나로 형성되겠는가. 비밀은 지워질 수 없는 기억, 속죄되어야 할 현재다.

‘노동자로서의 나’가 또 중요하다. 금고 제조공으로서 “아무도 열지 못하는 금고는 존재해도 오직 한 사람에게만 열리는 금고를 만들 수는 없”음에도 40년 동안 뛰어난 실력으로 “재산이나 비밀을 숨기고 싶은 고객들을 만족시켜왔다.” 와중에 큰 부를 쌓았다. 금고는 나의 과거이자 미래요, 신념이고 신화다. 사장이 아마도 나에게 오래전 아내를 소개해준 이유일 테며, 내가 유산처럼 금고를 아내에게 남긴 이유다. 나는 두 가지 경로로 죽음으로 향한다. 더는 기억되지 않고자 함, 더는 쓸모가 없고자 함으로써인데, 마침내 금고 제작 비법을 외국인 노동자에게 전수한다. 허나 뇌졸중 1년여 뒤 식물인간이 된 나에게 ‘비밀’을 털어놓는 지인들 있으니, 그는 죽더라도 ‘금고’가 된 자신과 그가 남긴 금고로 소멸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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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나’가 이 소설 대마루를 올리는 세 번째 주인공이다. 작가의 화두이자 서사의 방편으로도 돌올하다. 치유차 천변을 걸음으로써 나는 (혼잣)말하는 자, 기억하는 자가 된다. “한 인간이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만이 곧 그의 인생이자 세계”다. 표명하여 존재하고 존재되어 기억된다. 식민시대, 군부독재 정권을 지나 건설업체 사장 출신 대통령이 하천을 복원하던 과거사로부터 당대, 여러 도시의 천변에서 맞닥뜨릴 장삼이사들의 백태까지 사변된다. 시대나 공간, 인물이 연상은 되어도 특정되진 않는다. 온갖 세계가 뒤섞이어, 누구의 역사도 아니지만 모두의 역사인 격이다. 여기엔 경중과 서열도 없다. 내가 위치한 세계로서, 순수와 사악, 염려와 저주, 속죄와 변명, 외로움과 사랑(의 모순)도 온전해진다. 고작 천변을 걷는 ‘나’가 “여자나 남자, 무슬림과 크리스천, 흑인과 백인, 젊은이와 늙은이, 부자와 빈자로 나눌 수 없는 인간들이 세상엔 훨씬 많다”는, “하천이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가는 게 아니라 미래에서 과거로 흘러오고 있다”는 사실에 닿기까지 김솔의 유려한 내러티브를 독자들은 보게 될 것이다.

나는 불구가 되기 전 금고를 아내에게 남겼다. 유언장과 이혼신고서가 담겼다. 더불어 보석과 한 권의 책이 담긴 작은 금고를 넣어뒀다. 아내가 금고를 여느냐, 어디까지 여느냐, 무엇을 집어 드느냐에 따라 사태는 달라진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동기에서건 금고의 다이얼을 매일 돌려보는 아내 자체다. 비밀번호를 추리하기 위해서라도 ‘나’와의 과거를 기억하고 뒤졌다는 얘기니까 말이다. “충동” 대신 “기억”만으로 사는 반신불수의 ‘나’를 “전율”시키는 유일한 사건이다. 소설 전체에서 가장 생동하는 단어로 딱 한 차례 등장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아내는 이윽고 그 시도조차 중단하고 말았으니, ‘나’는 죽어서도 외롭겠다.

주인공이 누구든 간에 진리는, 그 많은 역사를 보듬고 뒤섞어 하천은 천연히 흐를 뿐이란 사실이다. “우리의 죽음은 불멸하는 영혼과 필멸하는 육체가 동시에 완성한 사건이 아니라, 우리를 대신해서 살아갈 자들에게 육체와 영혼을 한꺼번에 빼앗기는 사건에 불과하다.”

이것은 냉소도 허무도 아니다. 금고가 열리지 않길 바라는 작가의 속내가 엄연하기 때문이다. 비밀의 내용보다 ‘비밀의 금고’라는 형식이 눈에 들어온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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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필요한 진실을 영원히 봉인하기 위해 죽음이 인간을 찾아온다. 조물주에게도 비밀을 영원히 숨겨둘 금고가 필요한 것이다.”

2012년 등단 이래 13종 단행본을 펴내고 문지문학상, 젊은작가상 등을 수상한 김솔은 이 소설을 직접 현대문학에 투고했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51번째)로선 없던 일이다. 그는 “여전히 제 대표작이 생각나지 않고, 그간 발표한 작품들로 인해 출판사들이 손해를 봤다는 것과 저의 작품에 호의적이었던 편집자나 편집장이 출판사를 떠났다는 것, 그리고 제가 거의 쓸 수 없는 책들이 베스트셀러에 등극하고 있다는 것”을 들어 전업작가가 되기 어렵다고 출판사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자학적 유머와 깊은 자의식 사이를 독자들이 걸을 기회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