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 위키미디어 코먼스
철학자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 위키미디어 코먼스
광고

기준 없이
칸트, 화이트헤드, 들뢰즈, 그리고 미학
스티븐 샤비로 지음, 이문교 옮김 l 갈무리 l 2만4000원

미국의 철학자이자 문화비평가인 스티븐 샤비로(70)가 쓴 ‘기준 없이’는 근래 다시 조명받고 있는 철학자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1861~1947)의 철학을 질 들뢰즈 철학과 연결해 조명하는 책이다. 2009년 이 책의 영어판을 출간한 뒤 샤비로는 2014년 펴낸 ‘사물들의 우주’에서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다시 상세히 살폈다. ‘사물들의 우주’가 2021년 먼저 우리말로 출간됐고, 이번에 그 전작인 ‘기준 없이’가 번역돼 나왔다.

화이트헤드는 초기에 수학자로서 버트런드 러셀과 함께 ‘수학 원리’(전 3권)를 쓰기도 했으나, 후년에 철학적 탐구의 방향을 바꿔 ‘과학과 근대세계’, ‘과정과 실재’, ‘관념의 모험’ 같은 저작을 통해 독자적인 형이상학 체계를 구축했다. 이 책에서 샤비로는 화이트헤드와 하이데거 사상을 비교하는 데서 논의를 시작한다. 흥미롭게도 하이데거의 주저 ‘존재와 시간’(1927)과 화이트헤트의 대표작 ‘과정과 실재’(1929)는 거의 같은 시기에 출간됐다. 화이트헤드와 달리 하이데거 철학은 이후 20세기 탈근대철학이 흥성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광고

여기서 샤비로는 “하이데거를 대신하여 화이트헤드가 탈근대적 사유의 지침을 정했더라면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하고 묻는다. 화이트헤드가 하이데거의 자리를 차지했더라면 탈근대철학의 양상이 매우 달라졌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하이데거는 “도대체 왜 존재자가 있고 오히려 무가 아닌가?” 하고 ‘존재’에 관해 물었고, 화이트헤드는 “어째서 항상 새로운 무언가가 존재하는가?” 하고 ‘창조’와 ‘생성’에 관해 물었다. 태곳적부터 존재하는 오래된 것보다는 ‘새로운 것’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 화이트헤드의 사유다. 샤비로는 이 물음이야말로 참으로 긴급하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 샤비로는 화이트헤드 철학의 바탕에 깔려 있는 것으로 칸트 철학, 특히 칸트의 미학적 사유가 담긴 ‘판단력 비판’에 먼저 주목한다. 칸트는 미학을 경험적 지식이나 도덕적 법칙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예외들의 영역으로 개방한다. 위대한 예술작품은 모두 독특하고도 독창적인 것이어서 모방될 수 없고 반복될 수 없다. 그것은 우리의 인식법칙·도덕법칙 밖에 있다. 화이트헤드는 칸트의 이 미학적 전제를 받아들인 뒤 이 미학을 거점으로 삼아 새로운 ‘형이상학적 사유’를 감행한다. 이 형이상학적 사유를 통해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이 수립된다. 과정철학은 모든 실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과정 속에서 창조되고 생성되는 것이라고 본다.

광고
광고

이렇게 ‘사물이나 사태는 어떤 경우에도 그대로 머물러 있거나 똑같은 상태를 반복하는 경우는 없으며 언제나 창조적인 과정 가운데 있다’는 것이 화이트헤드의 근본 발상이다. 화이트헤드의 이런 생각은 “세계는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사건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보는 들뢰즈의 생각과 겹친다. 겉으로 보기엔 견고하고 항구적인 대상도 실은 사건 속에 있다는 것, 다시 말해 ‘끊임없는 일어남의 상태’에 있다는 들뢰즈의 생각은 모든 것이 창조와 형성의 과정에 있다고 보는 화이트헤드의 생각과 통하는 것이다. 이런 사유를 근본으로 삼으면 사물은 생성으로만 존재하며 생성이야말로 존재의 가장 깊은 차원이라는 세계상이 뚜렷해진다. 매 순간이 새로운 창조이며 새로운 사건이다.

이렇게 샤비로는 칸트의 미학을 출발점으로 삼아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으로 들어가고 거기서 다시 들뢰즈의 사건철학과 만난다. 화이트헤드를 거점으로 삼아 탈근대철학을 새롭게 사유하는 작업이 이 책의 내용이다.

광고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