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암산 줄기의 ‘당이산’은 청주의 ‘진산(고을의 뒤쪽 큰 산)’이다. 백제의 토성이 있던 이 산의 당집(신을 모셔 받들어 위하는 집)에선 매해 ‘청주의 안녕을 비는’ 산신제가 열렸다. 그래서 청주 사람들은 이 산을 ‘당집’ 혹은 ‘당산’이라 불렀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당이산의 당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신사’를 지었다. 일본 신사의 정원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등 일제가 약탈한 충청도의 문화재로 꾸며졌고, 그때부터 당이산(당산)은 ‘동공원’(청주 동쪽의 공원) 따위로 불리기 시작했다. ‘청주 사람’의 자존심을 짓밟고 ‘한민족의 얼’을 망가트리려 한 일제의 만행이었다.
남북 분단과 군사독재를 겪으며 당산은 또 한번 수난을 겪었다. 박정희 정권은 ‘전쟁 때 쓸 방공호나 공무원 비상근무 공간’을 만든다며 전국 곳곳에 벙커 등 비상시설을 만들었다. 비슷한 이유로 1973년 12월 당산에도 터널이 뚫렸다. 산 아래 암반을 폭 4m, 높이 5.2m, 길이 200m로 파고들어 만든 당산 ‘터널벙커’는 그렇게 만들어져, 50년 동안 충북도청 대체 비상시설로 ‘어둠 속에’ 존재했다.

오랜 세월 비밀스럽게 닫혔던 20∼30㎝ 두께의 ‘터널벙커’의 철문이 세상에 열린 건 2023년 11월이다. 시민에게 개방된 터널 입구엔 ‘당산 생각의 벙커’란 새 이름이 붙었다. 이후 당산 터널벙커와 벙커 위 2만평(6만6천㎡) 공원, 성안길·도청·충북문화관·청주향교 등을 이어 ‘청주의 몽마르트르’로 만든다는 충북도의 구상은 조금씩 꼴을 갖춰가고 있다. 개방 뒤 벙커는 조명·천·미술작품 등이 곁들여져 색을 입는 중이다. 지난해 12월엔 벙커에서 빵과 커피를 주제로 ‘빵·커 축제’도 열렸다. 카페산·흥덕제과·본정초콜릿 등 지역 유명 제과·제빵·커피점의 빵과 커피를 클래식·재즈 선율이 흐르는 벙커에서 맛보고 즐기는 시간이었다.

지난 15일부터 ‘생각의 벙커, 색에 물들다’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작가 8명의 색을 이용한 독특한 조형 세계가 벙커를 채운다. 도로시 엠 윤 작가의 디지털 기술과 융합한 인터랙티브, 조은필 작가의 파란색 날개, 김윤수 작가의 푸르스름한 걸음걸이 조형 세계, 쑨지 작가의 어둠 속 빛나는 안료를 사용한 초현실적 공간, 최성임 작가의 플라스틱 망과 공을 이용해 직조한 붉은색 중앙통로, 노경민 작가의 붉은 방, 이규식 작가의 붉은 글씨 자서전, 고정원 작가의 재활용을 활용한 네온사인 등 작품이 벙커 안의 8개 방과 통로에 설치됐다. 양기용·심규석 작가의 한글 조형물과 키즈존, 현대미술 거장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을 모티브 한 공간과 컬러링 북 체험 프로그램 등도 마련됐고, 3월 매주 토요일 오후 1시와 3시엔 ‘봄’을 주제로 클래식 공연도 한다. 개막식은 18일 오전에 열리고, 전시는 오는 6월3일까지 80일 동안 이어진다.
충북문화재단 관계자는 “닫힌 회색빛 동굴이던 당산 벙커에 색을 입혀 생기를 불어넣으려 했다”며 “올봄 예술가들의 상상력으로 물든 ‘생각의 벙커’에서 ‘어둠 속 빛깔과 살아남’을 경험하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최예린 기자 floye@hani.co.kr